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⑫

世人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 亦不立 無者 無何事
念者何物 無者離二相諸塵勞 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姓起念 雖卽見聞覺之 不染萬鏡而常自在

세상 사람들이여, 견해를 여의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생각을 짓지 않으면 생각은 없는 것이니 ‘무념’ 또한 세울 수 없다. ‘없음’은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인가! ‘생각’이란 어떤 물건인가? ‘없다.’는 것은 모든 번뇌에서 두 가지의 상을 여읜 것이다. 진여는 생각의 체(體:본체)이고 생각은 진여의 용(用:쓰임, 작용)이다. 본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즉시 보고, 듣고, 알더라도 만물 경계에 물들지 않으니 늘 자재하다.

 

혜능은 생각의 산물인 번뇌를 진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인들의 상식적인 판단과는 많이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는 ‘생각이란 번뇌의 씨앗’이어서 번뇌를 소멸시키려면 생각 자체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혜능의 가르침은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 작용이 오히려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생각이 일어나는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본성의 작용에 속한다는 매우 긍정적인 가르침이다. 이것은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이미 일어난 생각이더라도 머무름이 없게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維摩經云 外能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 善知識 此法門中 座禪無不着心
亦不着淨 亦不言動 若言着心 心元是妄
妄如幻故 無所著也

《유마경》에 말하기를 ‘응당히 밖으로는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해야 하고 안에서는 최고의 대의에 움직임이 없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선지식이여 이 법문에서 좌선이란 마음에 집착하지 않음도 없다. 또한 고요함에도 집착함이 없어야 하고, 아울러 움직임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마음에 집착된 말을 했더라도 마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다. 허망함은 환영과 같기 때문에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좌선을 설명함에, 《유마경》의 가르침은 사량분별심을 제거하는 것만을 능사로 여겼던 수행자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가르침일 것이다. 밖으로 분별심을 내지 않으려고 집착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안에서는 더 큰 사량 분별심에 속박된다는 말이다. 겉으로 고요하게 보여도 마음 안에서는 번뇌가 치성하다면 바른 좌선이라 볼 수 없다. 밖으로는 번잡해 보여도 안은 고요하다면 오히려 이와 같은 것이 앉고 섬에 관계 없이 움직임이 없는 진정한 좌선이 될 것이다. ‘만일 마음에 집착되어 말을 했더라도(:若言著心)’의 밑줄친 글자는 돈황본 원문에 불명확하게 기록되 있다. 일반적으로 ‘간(看)’자로 교정하여 번역하지만 개인적으로 ‘착(著)’으로 해석하여 이하에 기록했다. ‘간(看)’으로 번역하면 문맥상에 의미가 충돌되어 다음 문장들의 해석에 어색함이 많기 때문이다. 즉 ‘간(看)’을 해석함에 ‘살피다, 헤아리다.’ 등은 정(淨)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제시되기에 수행자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 특히 부처님의 핵심 수행법인 ‘사념처(四念處)’의 사띠(sati:알아차림)와 정면으로 충돌될 여지가 크다. 만일 중국의 선(禪)불교의 수행 체계가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나, 기본 수행 방법과 다른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면 그 종교는 불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若言着淨 人姓本淨 爲妄念故 蓋覆眞如
離妄念 本姓淨 不見自姓本淨 心起着淨 却生淨妄
妄無處所 故知 着者着却是妄也

정(淨)에 집착된다는 것을 대략 말하자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생각이 망령된 연고로 진여가 덮여 있는 것이다. 망념을 여의면 본래 성품인 청정함이 된다. 자기의 본래 성품인 청정함을 보지 못하면 마음은 고요함에 집착함을 일으켜서 오히려 청정하려는 망념을 낳게 된다. 망념은 의지할 곳이 없는 고로, 알지라! 집착이란 집착을 물리치려는 망령됨이 아니겠는가!.

정(淨)에는 근본적으로 집착할 수 없는 구조로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정하고 고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마음이 청정함을 추구하는 욕망을 허용하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본래 청정함을 봐야 욕망 자체를 소멸시키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고 충분히 받아드리면 청정함이든, 고요함이든 어떤 선의에도 집착심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청정함이나 고요함은 좋은 것이라는 상에 빠지면 오히려 청정함이라는 망념에 소박되는 일들이 생긴다는(:却生淨妄) 것이다. 집착이란 집착을 제거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집착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此作見者 章自本姓
却被淨縛 若不動者 見一切人過患 是性不動 迷人自身不動

정(淨)에는 형상이 없는데 도리어 정(淨)의 상(相)을 세우는 것이 되니 말로 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짓는 것은 글이 갖는 본래 특성으로 오히려 정(淨)의 껍데기에 속박당하게 된다. 만약에 움직임(동요됨)이 없게 하려면 일체 인간의 과오와 근심을 보는 견해가 그 본성에서도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미혹한 이는 자기 몸을 움직이지 않게 하려고만 한다.

‘말로하는 공부(:言是功夫)’,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구생태계의 최상 포식자에 올랐고 영장류의 권능을 부리며 지속적인 문화의 진보를 가져왔다. 이렇게 인류의 진화는 계속될는지는 미지수다. 물질적 측면에서는 많은 발전을 이룩해 놓았지만,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퇴보했다. 영혼의 진화는 물질의 지나친 발전에 희생양이 되고 있다. 인류의 언어적 발달은 인류문화의 다양성과 과학적 진보를 이루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언어나 문자가 갖은 태생적 한계인 논리를 초월하는 연구에는 한 치의 진보도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정보에 매몰되어 자신의 본성을 잃어가는 비인간적인 환경만 가중되어 인문학적 삶의 질은 더욱 악화된 것이 사실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인류가 과학적 발전을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필히 극복해 내야 할 인류 공통 과제이다. 아마도 그 유일한 대안은 불교의 ‘공(空)’과 ‘무아(無我)’사상을 바탕이 되는 실질적인 마음 수행의 발전을 통해 극복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교계에서 ‘문자가 태생적 특성인(:章自本姓)’ 개념 속에 계박되는[:법상(法相)] 현상을 극복해 내지 못한다면 그 희망도 사라질 것이다. 이 한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가르침을 중생의 사고의 틀에 맞춰 이해하려는 고집에서 발생하는 중생들의 우매함이고 교만심일 뿐이다. 그와 같은 중생 심리를 갖은 이를 일러 ‘인연 없는 중생’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근본적으로 부처님과 인연 없는 중생은 존재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2022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평론 가작 입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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