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지혜롭게 자비심을 내는 자행 동녀

보리는 선재 동자의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고 힘을 꾹 주면서 말했다.
“오빠,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날 버리고 가지마.”
선재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널 버렸어?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고 했잖아.”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나는 정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러자 갑자기 선재가 가던 길을 멈추고 화난 표정으로 보리에게 말했다.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네게 나를 소개해준 문수보살님이나 부처님도 못 믿겠다는 소린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부처님께서 네게 화엄경약찬게의 53 선지식을 뵙게 해주려고 하시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지. 아까처럼 울고불고하면 되겠어?”
“내가 언제 울고불고했어? 울기만 했지.”
“소리를 지르며 우는 게 울고 불고지, ㅋㅋㅋ.”
보리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면서 선재와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알겠어, 오빠. 이제부터는 울고불고 안 할게. 그리고 잘 믿어볼게, 대신 선지식들 다 만나고 나면 집에 잘 데려다 줘야 해!”
보리가 있는 힘을 다해 예쁜 척하면서 사정하자, 선재는 대답 대신 맞잡은 손을 하늘로 치켜세우며 말했다.
“잘 들으셨죠? 부처님, 보리가 이제부터 말 잘 듣겠대요. 저를 믿겠다고 하네요.”
“오빠 앗!”
그렇게 둘은 퉁탕거리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사자분신성을 찾아갔다.
자행 동녀는 사자당 왕의 딸로 묘한 법문을 범천의 음성으로 말한다고 했다.
금실그물을 몸에 두르고 설법하는 그녀를 보러 성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선재가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당신들은 그 문을 지나서 어디로 왜 갑니까?”
“나는 이웃 사람과 크게 싸웠는데 동녀님께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로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지 물어보러 가는 길이요.”
“나는 내 돈을 훔쳐 간 사람을 붙잡았는데 어떻게 하면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 용서할 수 있는지, 자행 동녀의 묘법을 들으러 가오.”
“나는 이제 곧 병이 들어 곧 죽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하면 가족들과 많이 슬퍼하지 않고 서로 편안하게 죽고 이별을 할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해요.”
선재 동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이 들어가는 데 출입에 제한이 없음을 알고 보리와 함께 성문을 넘어 자행 동녀를 찾았다. 그가 자행 동녀에게 보살도와 보살행을 어떻게 구했는지 묻자 동녀가 말했다.
“그대는 내가 이 궁전을 어떻게 장엄했는지를 보라.”

삽화=서연진 화백
삽화=서연진 화백

 

선재와 보리가 엎드려 절하고 두 손을 합장한 채 벽과 기둥을 살펴보니 여러 부처님께서 태어나 출가를 하고, 도를 이루어 깨달음으로 마음을 내서 보살행을 닦는 모습, 큰 서원을 세워서 고행을 겪어 마귀를 물리치는 모습, 공덕을 이루어 법륜을 굴리다가 열반에 드는 모습이 깨끗한 물에 그림자가 비치듯 영화처럼 보였다. 여러 부처님의 형상을 보면서 자행 동녀를 쳐다보는 순간 동녀가 말했다.
“나는 반야 바라밀다의 높은 지혜를 부처님께 얻어서 다시 중생들에게 많은 지혜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저기 보이는 여러 부처님의 말씀은 다들 똑같지 않듯 지혜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그들에게도 해탈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건 어떤 방법일까요?”
보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건 매우 간단한 일인데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눈앞에 있어도 잘 모르기 때문에 일러주는 것이지. 예를 들면 친구들과 싸웠어도 잘 화해하는 방법이라든가, 도둑질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나쁜 마음을 바르게 돌려서, 착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숲을 이루는 방법, 더럽고 평탄하지 못한 것을 깨끗하게 부처님의 광명으로 성취하는 방법들이지. 그건 바로 나쁜 것을 보고도 물들지 않도록 마음을 잡아주는 처염염불을 하는 거라네.”
자행 동녀가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자줏빛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꼭 만화에 나오는 천상 선녀 같음에 보리는 움찔움찔 뒤로 물러났다.
선재 동자는 동녀의 한없는 자비심에 머리가 저절로 숙어지면서 깊은 보살행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저 선지식처럼 높은 반야 바라밀다로 많은 사람을 구해 지혜의 바다에서 서로 위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도록 처염염불을 많이 해야겠다.’
“선재야, 너 역시도 무상 보리심을 내었구나. 하지만 나는 한없는 지혜의 자비심을 낼 줄만 알았지, 지혜를 제대로 쓸 수 있는 허공과 같이 광대한 부처님 마음과, 모든 세상의 의지가 되는 등불 같은 빛은 내지 못한다. 여기서 더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내려가면 삼안국에 선견 비구가 있으니, 그에게 광대한 부처님 보리도를 물어보아라.”
선재와 보리가 자행 동녀에게 다시 엎드려 절을 하고 나오는데 저절로 둘의 손이 맞잡아졌다.
“어, 우리 둘의 손이 저절로 잡혔네.”
보리가 활짝 웃으며 선재를 쳐다보았다. 따스한 햇볕에 보리의 이빨이 가지런히 빛났다.
“내 마음이 자비심으로 움직여 두 손이 붙어버렸네. ㅋㅋㅋ”
“뭐라는 거야?”
“내가 동녀님의 말씀을 듣고 제일 먼저 보리의 믿지 않는 마음을 없애주려고 했거든.”
“뭐? 그럼 내가 나쁜 사람이야?”
“아니, 그렇다기보다….”
선재가 보리의 손을 놓고 저만치 도망을 간다.
“치이, 오빠는 빵꾸똥꾸야. 치”
“뭐? 빵꾸똥꾸? 그게 무슨 말이야?”
“안 가르쳐줘!”
도망간 선재가 돌아오고, 이번에는 보리가 휑 가버린다.
“빵꾸똥꾸? 그런 말도 있나?”
선재는 머리를 갸웃하더니 안 가르쳐주면 나중에 문수보살님한테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보리를 잡으러 뛰어간다.

-2022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 가작 입상

【주석】

장엄 : 웅장하고 위엄이 있게 꾸밈.
열반 : 모든 것을 떠나 죽음.
법륜 : 부처님의 가르침.
출가 : 집을 떠남, 세속을 버리고 불교에 입문하는 것.
교화 : 가르쳐서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
처염염불 : 나쁜 것에 물들지 않는 염불.
빵꾸똥꾸 : 바보라고 놀리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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