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에서 ‘아득한 성자’를 보는 혜안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오현스님의 〈아득한 성자〉 전문

 

위 시편은 2연으로 돼 있다. 1연에는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의 삶이 묘사돼 있는 반면, 2연에는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은” 시적 화자의 회한(悔恨)이 깃들어 있다.

시적 화자인 오현 스님은 살아생전 베푼 자비섭화(慈悲攝化)는 출세간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사람이 스님에게서 지척(咫尺)의 자로는 잴 수 없는 대방무외(大方無外)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오현 스님 자신은 여러 시편에 자신을 한낱 미물에 비유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오현 스님의 〈적멸을 위하여〉 전문

오현 스님의 안목(眼目)으로는 가장 짧은 시간인 찰나가 가장 긴 시간인 영겁으로, 가장 낮은 존재인 미물이 가장 높은 존재인 성자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현 스님은 “중생의 삶이 바로 팔면대장경이고 부처고 선지식”이라고 일갈하면서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는 선지식의 행태를 꼬집기도 했다.

오현 스님의 〈아득한 성자〉는 마조 선사의 화두인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을 떠올리게 한다.

병환으로 몸이 편치 않은 마조 선사에게 원주스님이 문안인사를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요즈음 법체가 어떠하십니까?”
원주스님의 질문에 마조 선사가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네.”

《불명경(佛名經)》에는 “월면불의 수명은 일일일야(一日一夜)이며, 일면불의 수명은 1800세”라고 쓰여 있다.

마조 선사가 수명이 1800세인 일면불과 수명이 1일인 월면불을 나란히 호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심안(心眼)이 열린 각자(覺者)의 시선으로 보면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이 다르지 않고,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에 따르면, 시간이라는 균질적인 것도, 선형적인 것도, 직선적인 것도 아니다. 시간은 영원한 현재형이므로 과거는 되새겨지는 현재이고, 미래는 끌어당긴 현재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들뢰즈는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과 아이온의 시간으로 나눠서 설명했다. 순차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달리 아이온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상호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시간론과 들뢰즈의 시간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설한 ‘인간의 시간’이다. ‘인간의 시간’은 플라톤의 ‘상기(想起)’에 영향을 받았다. 상기란 ‘잊었던 것을 기억해내는 것’을 일컫는다. 간단히 말해 기억이 있어 시간은 유한성을 극복하고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 겁(劫)과 찰나(刹那)라는 시간 단위가 있다. 겁은 한 변이 1유순(100리) 되는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백년에 한 개씩 꺼내서 다 없어지는 시간을 일컫는다. 그야말로 장구한 시간이다. 그런가 하면 찰나는 75분의 1초,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상 대사는 〈법성게(法性偈)〉를 통해 일념(一念)이 곧 무량겁(無量劫)이라고 역설하였다.

찰나가 영겁이 되고, 영겁이 찰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비록 한 사람의 생애는 유한할 지라도 그 사람의 깨달음은 영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도 연장선상에 해석이 가능하다.

‘하루살이’에게서 ‘아득한 성자’를 읽을 수 있는 안목, 오현 스님만이 지닐 수 있는 혜안(慧眼)이리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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