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⑪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念念 後念念念
相讀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卽是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一念 若住念念卽住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即無縛也 以無住爲本

머무름 없음은 사람의 본래의 성품이다. 생각에 생각이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앞선 생각의 생각 생각이 뒤이은 생각의 생각 생각과 서로 셈을 하게 되어 단절됨이 없게 된다. 만일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은 곧 색신을 여읜다. 생각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볼 때 모든 법에는 한 생각도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생각에 생각으로 머무르면 즉시 이름에 계박 된다. 모든 법에 있어서 생각에 생각으로 머물지 않으면 즉시 계박됨이 없어진다. 이렇기에 머무르지 않음이 근본이 된다.

 

머무름 없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본래 갖는 성품이라 한다. 사실 믿어지지 않는 말이다. 특히 불교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중생의 마음이 얼마나 머무름(집착)이 강한지를 알 것이다. 그렇지만 진리가 그러하다 하니 우리는 자신의 기준을 내려놓고 성현의 가르침에 믿는 마음을 내야만 한다. 이런 믿음이 견고해져야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이해하는 데 별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생각 생각이란 연이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한 번의 단절이 일어나면 색신의 속박에서 법신은 벗어나서 자유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생각을 생각하는 것이 뒷생각이 되고 그 생각 생각들은 계속 멈춤 없이 일어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생각이라는 성품 자체가 어느 한구석에 머물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생각에 집착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생각들이 계속 일어나도 일체의 법에서는 머무름의 현상이 발생하지 않으니, 생각의 번뇌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대상에 집착하고 머무는 특성이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이런 이해충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름에 속박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름(개념)에 속박되는 것을 ‘머무름’이나 ‘집착한다.’로 착각한다는 것이며 결국 그것에 속박된다는 말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번뇌란 조복받기 힘든 마구니다. 하지만 혜능의 가르침대로라면 집착 현상이 일어나도 큰 문제 될 것이 없다. 본래 생각 자체에 머무는 습성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용기를 내어 힘껏 닦아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다.

善知識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是
是以無相 爲體於一切鏡上不染名爲 無念於自念上離鏡不
不於法上念生 莫百物不思念盡除却 一念斷卽無別處受生

선지식아! 모든 상의 껍데기를 여읜 것이 무상이다. 다만 능히 상을 여의니 성품은 본래대로 청정이다. 이처럼 무상을 체로 삼기에 모든 거울은 이름(개념, 표상)으로 오염시킬 수 없는 것이다. 무념은 거울을 떠나 표면 위에 있는 자기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법 위에도 생각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백 가지 물건들을 사량하지 않음으로 모두 제거하여 물리치려 하지 마라. 한 생각 끊어지면 즉시 분별 없는 곳에 태어난다.

무상(無相)의 의미를 거울 표면에 맺혀지는 만상(萬象)에 붙들리지 않으므로 비유했다. 분명히 거울에 비친 모습은 실제와 동일하게 보인다. 거울의 표면상에 일어나는 모습은 실제와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표상들에 의해 거울은 오염되지 않는다. 이런 상식적인 일을 받아들일 수 있듯이 우리의 마음에 인지된 표상들도 이와 같이 인식하게 되면 그것이 무상(無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내 마음으로 들어와 보면 그렇게 되질 않으니 큰 문제다. 오감(五感)이 대상과 접촉하면 그것과 연관된 기억들을 소환하고 그 기억과 서로 비교·분석한다. 그렇게 마음에서 정리하고 판단하는 일은 찰라 지간에 일어난다. 이런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무상(無相)으로 판단할 겨를이 없다. 또한 무상이라고 분류해 놓을 기억 소자(素子)도 없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런 오온(五蘊)의 메카니즘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의식작용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실질적인 수행법을 제시했다. 그것이 사념처(四念處)1) 수행이다. 하지만 중국 불교의정서에서는 인도 불교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성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만의 언어로 표현하고자하는 욕망이 자주 보인다. 혜능의 가르침 핵심은 머무름도(住), 상(相)도 본래 없음을 체(體)로 하기에 그것에 전전긍긍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치 거울에 상이 맺히더라도 정작 거울상에 아무런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비유처럼 말이다. 이런 당연한 거울의 이치가 수시로 경각되어 있다면 만상(萬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수고로움도 일으킬 필요가 없게 된다. ‘무별처에 몸을 받아 태어난다.[:無別處受生]’는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생각 생각들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한 생각만 끊어진다면 육도 윤회를 벗어나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해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이본(異本)에는 ‘경계 경(境)’으로 수정하여 번역하지만 본서는 ‘거울 경(鏡)’ 그대로 해석하여 혜능의 ‘무상(無相)’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번역했다.

學道者 用心 莫不息法意自錯尙可 更勸他人 迷不自見
迷又謗經法 是以立無念爲宗卽緣 名人於鏡上有念
念上使去耶見 一切塵勞妄念 從此而生 然此敎門
立無念爲宗

도를 배우는 자가 마음을 씀에 있어 법을 헤아리는 것을 쉬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옳다고 말하지 마라, 하물며 남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하여 자기를 보지 못함이로다. 미혹하면 또한 경전을 비방하게 되므로 무념을 세워 종지로 삼는 연유이니라. 사람의 이름은 거울에 맺혀진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으로 하여금 사견을 물리치려 하니 모든 번뇌 망상심은 이로부터 일어난다. 이런 연유로 이 가르침을 무념으로 세워 종지로 삼아라.

‘학도자(學道者)’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도를 수행하거나 깨치는 자가 아닌 도를 이론으로 배우는 사람을 힐난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를 닦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이론화된 도의 알음알이로 자기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남에게 자신의 알음알이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배웠거나 경험한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데서 오는 심리이다. 반면에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증험해 내는 일에 충실한 이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업식을 관(觀)하기 때문에 외부의 대상에 머무를 시간이 없다. 그리고 마음에서 진실로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거울에 맺혀진 허상임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사념처 수행은 『염처경(念處經)』에 제시된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확립해나가면서 지혜를 증득하는 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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