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활동의 지향점 ‘조선학’에서 ‘국학’으로

초의 선사를 세상 사람들에게 최초로 알려

한국 차문화 정체성 확립하고 대중화시켜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茶道)

원화 채정복 지음

민족사

57,000원

 

 

“효당(曉堂) 최범술(1904~1979)은 불교계의 인물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요, 경남 사천시 제헌의원을 지낸 정치가이며 현대 차 문화의 중흥조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외에서 동지들과 함께 열렬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수십 회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 대표·해인사 주지·국민대학 창설 및 이사장·제헌의회 국회의원·해인대학 설립 및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오로지 불교인으로서 평생 전념해온 원효 성사 교학 복원과 연구에 매진하며 도제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잊혀져가던 한국 차문화를 중흥시켜 현대 한국차문화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137쪽)

사진1 - 만년의 효당(1975년 1월 9일).
사진1 - 만년의 효당(1975년 1월 9일).

효당의 일생을 압축 해설한 문장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효당의 생전 자료를 총망라해 효당의 모든 활동의 성격과 지향점이 ‘국학’으로 귀결했음을 최초로 논증했다. ‘국학’은 단순한 전통의 계승이 아닌, 근대적인 민족적 자아의 재발견을 말한다. 나아가 그 지향점이 ‘살아있는 사람’이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효당은 부처와 중생을 나누어 성불(成佛)을 어떻게 하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직면한 일상사의 소중함과 자연스러운 순리와 부지런한 정진을 강조하며 그것을 실천하고자 했다. 효당은 이를 ‘대사회성(大社會性)’이라고 칭했다.

불교인으로서 효당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해인사 인경(印經, 목판을 인쇄해 책으로 만드는 작업) 도감을 맡아 《고려대장경》 인경을 불교계의 동지들과 함께 6개월간 작업해 11월에 완성했다. 이때 효당은 국간판(국가가 제작한 경판) 대장경 외에 그동안 해인사 장경판고의 동서재에 방치되어 오던 사간판(지방관청이나 사찰에서 제작한 목판)도 빠짐없이 인간(印刊)해 11,391판에 달하는 「해인사 사간 루판 목록(海印寺寺刊鏤板目錄)」을 완성했다. 이 사간판에서 국간판보다 훨씬 정교하고 우아한 요나라 대안본(大安本)과 수창본(壽昌本)이 발견되었고,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원효대사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상권판 4쪽, 고려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완질, 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등이 발견되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간판 고려대장경이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 중심으로 구성된 데 비해, 이들 사간판은 경전의 주석, 중국과 한국 승려들의 개인 찬술, 고승의 전기 어록, 불교 의례 등 다양한 전적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인경작업을 감독하고 있는 효당(왼쪽 두 번째 양복 입은 이)
인경작업을 감독하고 있는 효당(왼쪽 두 번째 양복 입은 이)

 

효당은 차성(茶聖)으로도 불리는 초의 선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사장(死藏)된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경남 사천 다솔사에서 차나무를 심어 차를 직접 만들고 한국 최초의 상업판 단행본인 《한국(韓國)의 차도(茶道)》를 저술해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국 차문화를 대중화시켰다.

효당의 차도는 ‘남녀노소 어떠한 부류에 관계 없이, 누구나 차를 즐기고 차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차를 어떤 특정 장소, 특정 신분, 특정 형식 등 어떠한 경계를 두지 않고 차생활은 인간의 본능에 속하는 행위로서 누구나 평등하게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의 범주에 속하며 차도(茶道)에는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할 문이 없다는 ‘차도무문(茶道無門)’을 강조했다. 그의 평등한 차 생활은 부처와 중생이 다른 존재가 아니며 누구나 불성이 있다는 개념과 상통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차도회’를 창립하고 전국 각지에 차를 애호하는 동호회가 생김으로써 차생활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했다.

저자인 원화(元和) 채정복은 효당본가 반야로차도 문화원 본원장이자 효당사상 연구회 회주이다. 고교 시절부터 효당과의 인연이 시작돼 대학교 3학년 때 효당의 문하에 정식 입문했다. 효당의 맏제자로 원효(元曉)의 원(元)을 받아 원화(元和)라는 호를 받았으며 다솔사에서 효당을 시봉하며 효당의 차문화 업적 실현을 위해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녀는 효당을 이어 원효학 공부, 차도 수련뿐만 아니라 특히 독자적인 ‘반야로선차도’를 개창해 국내외에 선차문화 열풍을 일으키는 등 한국 차문화의 족적을 진일보시켰다.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茶道)》는 그녀의 2년 전 한국외국어대 박사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최승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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