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공양 의미 일깨워준 ‘등신불(等身佛)’

허리도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그러한 어떤 가부좌상이었다.

 

김동리 불교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등신불〉의 한 대목이다. 소신공양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등신불〉은 1961년 11월 《사상계(思想界)》 101호에 발표됐고, 1963년 정음사(正音社)에서 동명으로 출간된 단편집에 수록됐다.

이 작품은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외피는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으로 끌려간 23세의 화자가 부대를 탈영해 한 사찰에 은둔한다는 것이고, 내피는 소신공양을 한 만적 스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간 화자(나)는 중국의 북경을 거쳐 남경에 주둔해 있다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탈출한다. 그리고 불교학자인 진기수에게 식지를 잘라 혈서를 써서 구원을 청한다.

결국 진기수의 도움으로 정원사(淨願寺)에 머물게 된 화자는 그곳에서 등신대(等身大)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인 금불상을 접하게 됨으로써 경악과 충격에 빠져든다.

이 등신불은 옛날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마침내 성불한 만적 스님의 타다 굳어진 몸에 그대로 금물을 입힌 것이다. 만적 스님은 어머니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인 사신(謝信)을 찾아 나섰다가 출가하게 되었고, 어느 날 문둥이가 되어 있는 사신을 만나게 된 뒤 충격을 받아 소신공양을 한 것이다.

만적 스님이 소신공양하던 날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발생해 새전(賽錢)이 들어온다. 그 새전으로 만적 스님의 법체에 금물을 입혀서 등신불을 조성한 것이다.

원혜 대사는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 이야기 끝에 화자에게 식지를 들라고 한다.

〈등신불〉은 현재의 화자 이야기와 과거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 이야기가 상호 연결돼 표리(表裏) 관계를 이루고 있다. 작품 속에서 만적 스님이 소신공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머니가 행한 악행을 씻기 위해서였다. 한 수행자의 고뇌(苦惱)와 비원(悲願)이 물적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 이야기와 현재의 화자 이야기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소신공양한 만적 스님의 가부좌상은 “허리도 펴고 앉지 못한” 채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고” 있다. 그래서 화자가 보기에는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것처럼 여기지는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기인한 형상의 등신불은 만적 스님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만적 스님은 어머니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 사신(謝信)이 문둥이가 된 것에 대해 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업보를 씻고자 소신공양을 하기로 원력을 세웠다. 이복형에 대한 죄의식이 ‘고뇌(苦惱)’라면, 그 죄의식을 씻고자 하는 원력은 ‘비원(悲願)’에 해당한다. 따라서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은 일종의 보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말미에 원혜 대사가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 이야기를 전한 뒤 화자에게 식지를 들라고 하는 이유는 화자의 식지와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화자가 식지를 자른 이유는 군을 탈영한 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일부 평자들은 개인적인 안위를 위한 화자의 행동을 숭엄한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과 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승속일여(僧俗一如)의 사상에 입각해 보면 만적 스님의 소신공양과 화자의 식지는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마조 도일 선사는 《마조어록(馬祖語錄)》에서 아래와 같이 설했다.

“너희들은 모두 각자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이 마음이 부처임을 확신하라. 달마 대사가 멀리 인도에서 일부러 중국으로 건너온 것은 오직 이 상승의 일심법〔上乘一心法〕을 전하여 너희들이 각자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화엄경(華嚴經)》에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쓰여 있다.

인간의 내면에 불성이 갖춰져 있으므로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게 대승불교 사상의 본지(本旨)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 즉,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원혜 대사가 만적의 소신공양 이야기를 전한 뒤 화자에게 식지를 들라고 하는 대목은 김동리 작가가 누구나 불성의 씨앗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주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법화경(法華經)》에 등장하는 상불경보살은 누구를 만나든 항상 “당신을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상불경보살의 일화가 주는 교훈은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욕심 때문에 중생으로 살아가고, 누구는 불법(佛法)을 실천해 성불한다는 것이리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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