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⑩

善知識 又見有人教人坐 着心着淨 不動不起 從此置切
迷人不悟 便執成顛 即有數百盤 如此教道者 故之大錯
善知識 定惠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即有光 無燈即無光
燈是光知體 光是燈之用 卽有二 體無兩般
此定惠法 亦復如是

선지식아! 다른 어떤 이가 사람에게 좌선을 가르침을 볼진대, 마음에 집착하고 고요함에 집착돼 있다. 움직이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렇게 되면 마침내는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사람은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고 곧 집착하여 전도된 것을 이루려하는데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가르치는 도인이라는 자들 때문에 크게 그르친다. 선지식아! 정(定)과 혜(慧)가 어떻게 동등한지 비유하자면, 등잔과 그 불빛이라 하겠다. 등잔이 있기에 불빛이 있는 것이다. 등잔이 없으면 빛도 없다. 등잔은 빛이 체(體)임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빛은 등잔을 그 쓰임[用]으로 하는 것이다. 즉 둘이지만 그 본체는 둘로 나뉠 수 없다. 이처럼 정혜법(定惠法)도 이와 같은 것이다.

 

착심착정‘(着心着淨)’이 돈황본 원문에는 애매하게 기록돼 있어 일반적 ‘간(看:볼 간, 살필 간)’자로 새겨 풀이하는 데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전후 문맥상 의미 전달에 어색함이 있어 ‘마음에 집착하고 고요함에 집착한다.’로 풀이했다. 전체적인 의미는 좌선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많은 이들이 몸과 마음에 집착된 전도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좌선의 핵심은 정(定)과 혜(慧)이다. 지관(止觀)쌍수의 수행법으로 초기불교의 삼마지, 위빠사나와 동일하다. 혜능은 이 둘을 등잔과 불빛을 비유하여 둘이면서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름을 붙여 인식할 때는 둘로 분명히 나뉘고 둘은 그 특성 또한 서로 다르지만 그런 분별심에서 나오면 일체로써 존재하고 작용되는 실체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핵심은 사량분별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하고 있는 마음상태를 돌이켜 보라는 의도이다. 이런 분별식에만 빠져있는 사람은 실질적인 수행을 하지 않는 심리상태임을 경각시키는 비유이다. 정(定)과 혜(惠)를 동일선상으로 보는 것은 기존에 선정을 이룬 뒤에야만 지혜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던 점오(漸悟)점수(漸修)의 정체된 불교에 저항하는 돈오(頓悟)돈수(頓修)의 개념이다.

善知識 法無頓漸 人有利鈍 明(1)即漸勸 悟人頓修
識自本是見本性 悟即元無差別 不悟即長劫輸迴

선지식아! 법에는 돈점(頓漸)1)이 없다. 사람에게 영리하고 둔함이 있을 뿐이다. 똑똑한 즉, 점(漸)을 권하고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는 일을 한다. 알아차림은 자기의 근본을 보는 본래 성품이다. 깨닫게 되면 근원적으로 차별이 없게 되고 깨닫지 못하면 오랜 겁 동안 윤회한다.

북종선과 남종선의 구분은 크게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로 나눈다. 그래서 남종선의 시조인 혜능을 돈오만을 주장한 것으로 판단하기가 쉽다. 하지만 본 돈황본을 보면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혜능은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켜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양단을 초월하여 통합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단지 앉아서 희론(戱論)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돈오돈수와 점오점수을 명확히 구분 짓는 일이 중요하겠지만 수행자에게는 그것은 필요 없는 논쟁일 뿐이다. 어둠을 밝혀 업식의 경계에 자유롭고 자 하는 이는 등잔을 사용하는 일에 관심을 둘 뿐 등잔을 해체하거나 분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명즉점권(明即漸勸)’의 ‘명(明)’자는 이(異)본에는 ‘미(迷)’로 된 것이 있다. 그래서 그 해석을 ‘미혹한 이는 점차적으로 노력한다, 또는 점오(漸悟)나 점수(漸修)를 권한다.’로 번역하지만 이렇게 되면 돈(頓), 점(漸)에 우열이 발생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수승하다 여기는 돈오돈수에만 머물게 되는 분별심만 키우는 꼴이 된다. 이런 결과는 혜능의 무념(無念)무주(無住)의 사상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명(明)’자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조금 머리가 똑똑한 이에게는 점(漸)을 권하여’로 번역하였다. 중생들이 근기가 부족하여 비록 사량분별심으로 보리도에 접근했더라도 결국에는 바른 깨달음으로 도달케 유도해 준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식자본시견본성(識自本是見本性)’의 해석은 ‘식(識)’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앞으로 식(識)을 초기불교 수행의 ‘알아차림[:sati]’으로 번역하면 많은 부분에서 혜능의 기존 중국식 불교의 편협함에서 벗어난 근본불교에 입각한 가르침의 특성을 엿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불교는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막론하고 그 근본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불교라고 말할 수 없다. 초기불교의 근본 수행법이나 중국으로 넘어온 대승불교의 선(禪)수행방식도 외형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근간은 부처님께서 제시한 ‘사념처’ 수행법을 벗어날 수 없다.2) 그렇다면 이 장(障)에서 혜능은 ‘식(識)’자의 의미를 단순히 지각하고 인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알아차림’의 개념까지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알아차림[:식(識)]이란 ‘본성 작용이며 본성을 보는 힘’이라는 의미로 새겼으며 그것은 초기불교의 ‘알아차림’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 無念無宗 無相無體
無住無爲本 何明爲相 無相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선지식아! 나로부터 시작되어 지금에 이른 법문은 돈점(頓漸)을 함께 세운다. 생각 없음이고 종지도 없음이로다. 상(相)도 없고 체(體)도 없어 머무름 없음과 무위(無爲)를 근본으로 한다. 상(相)을 어찌 밝히는가? 무상(無相)은 상을 여읜 상(相)이다. 무념(無念)은 생각하지 않는 생각이다.

‘아자법문(我自法門)~’에서 자신이 설한 법문은 모두 돈점(頓漸)을 함께 세웠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육조단경으로 수행한 자라면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머물러선 안 된다. 육조단경은 금강경의 무아(無我), 공(空)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생각도 없고 종지도 없다.’라고(:無念無宗) 하였으나 그것은 ‘생각하지 않는 생각’(無念者 於念而不念)이라 했으니,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공(無記空)이 아니다. 진정한 공(空)을 말하는 것이다. 상(相)이 없다는 설명도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식작용에는 없는 것을 인지하는 기능이 없다. 아니 그런 능력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만법(萬法)은 18계라고 하셨나 보다. 무상(無相)이란 상(相)을 여읜 상(相)뿐이라는 이 설명처럼 실상에 가까운 표현은 없을 것이다.

【각주】
1) 돈오(頓悟:단박에 깨침)와 점오(漸悟:점차적으로 깨침)
2) 졸고 「간화선의 알아차림을 통한 sns포교 연구」 주광탁, 석사학위논문(능인대학원대학교,20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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