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고통은 필연적이어서 세상은 고해(苦海)이며, 인간의 역사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부단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고통은 인간을 좌절하게도 하지만, “자신의 심연으로 깊이 내려갈 때 길잡이 역할을 하며 정신의 해방을 이루도록 해 사람을 고귀하게 한다.”1) 상처가 정신을 성장하게 하고 새 힘이 솟도록 만듦으로써 결국, 건강한 삶을 지향하도록 한다. 시작(詩作)의 한 편은 물속의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모든 고통의 매듭을 끊어버리려는 몸부림이 있을 터이다. 그러니 시에서 고통은 고통 자체일 수 없다.
고통의 시적 의미는 고해의 중생에게 탐진치(貪瞋癡)에 대한 성찰과 구도를 촉구하는 기제이다. 정호승도 “상처는 스승이다/ 절벽 위에 뿌리를 내려라”(「상처는 스승이다」)면서 삶의 고통을 긍정한다. 고통의 긍정은 인간을 더 강하게 해 자기 삶을 사랑하게 한다. 한편, 긍정을 통한 고통의 승화는 연꽃에 비유된다. 흙탕물은 우리가 사는 비극적 현실이며 그곳에서 피는 수련은 아름다운 시의 꽃, 인간의 꽃을 의미한다고 정호승은 말한다. 흙탕물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과정은 고통을 극복하는 구도의 길이다. 고통 극복의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정호승 시의 일군을 살핀다.

참회, 새 힘이 솟는 자리

정호승의 일관된 시정신은 고통의 긍정과 승화이다. 여기에는 그의 현실인식이 고통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시적 태도가 담겨 있다. 긍정은 무조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판단에서 문제가 되어있는 주어와 술어와의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일이다. 현실의 문제 그대로를 긍정해야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어서다. 현실의 부정은 고통에 대한 회피의 태도로 전환의 기회마저 가질 수 없다.
고통을 긍정하려면 먼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정호승 시가 인식한 1970~80년대 고통의 원인은 전쟁, 가난, 독재 등의 사회적 폭력이며, 그로 인한 죽음을 노래하고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정신을 이야기한다. 그의 1990년대 시는 고통의 원인을 허무적 상황에서 비롯된 균열된 자아에 두고, 그로 인한 충동과 갈등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지향한다. 2000년대 들어서 정호승의 시선은 아기 살해와 같은 사회적 타락에 닿는다. 이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죄의식을 갖게 되며 인간다운 삶의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기에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은 불교적 상상력을 채택해 구도의 실천을 지향하는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2010년대 들어서는 진흙소를 모티프로 삼아 구도의 길을 탐색한다. 불교에서 구도는 참회를 전제한다. 과오나 죄업을 깨닫고 뉘우치지 않는다면 불성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화를 내며 연꽃에 묻는다. 왜 진흙 속에서만 피어나느냐고, 진흙은 왜 당신의 아름다움에는 물들지 않느냐고. 그러고는 “가장 더럽고 가장 짓이겨진 진흙이/ 가장 맑고 가장 향기로운 연꽃을 피우므로/ 가장 더러운 진흙이 되기 위하여/ 오늘도 맨발로 나를 힘껏 짓이긴다”(「진흙이 되기 위하여」 부분). 이 행위는 “평생 화를 내며 분노 속에 살아”온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참회이다. 참회를 통해 가장 맑고 가장 향기로운 연꽃을 피우는 진흙이 되려고 자신을 파괴한다. 고행을 통해 오염을 정화하려는 태도다.

진흙은 연꽃을 피우는 토양이며, 연꽃은 불교의 시작과 함께한 꽃이다. 싯다르타가 태어나 동서남북상하의 여섯 방위를 향해 일곱 걸음씩 내딛자 그 걸음마다 연꽃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로 인해 연꽃은 불성을 상징한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이 된 이유는 “처염상정(處染常淨)과 화과동시(花果同時)의 특성”2) 때문이다. 처염상정은 진흙 속에 있지만 청정함을 유지하므로 불성에 비유한다. 화과동시는 꽃을 피운 뒤에 열매를 맺는 대다수 식물과 달리 열매가 익을 때 꽃을 피운다. 이는 모든 중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을 지녀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회는 거칠게 자신을 몰아세운다.

마지막으로 내 시체를 담아
관 뚜껑을 닫으리라
거지여인의 눈에 평생 동안 눈물을 흘리게 한
용서하지 못할 용서
평생토록 참회해도 참회할 수 없는 참회를
관 속에 집어넣고
탕 탕 탕
눈사태가 나도록 관 뚜껑에 못질을 하고
산정의 산정에 홀로 서서
내 관을 던지리라
-「나의 수미산」 부분

시적 화자는 빈 관을 끌고 산정에 올라간다. 빈 관에 눈보라와 햇살과 새의 울음소리, 자신의 시체, 용서할 수 없는 죄 등을 담아서 산정에서 던진다. 불교에서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으로 꼭대기 금강의 도장에 부처님의 전당이 펼쳐져 있다. 인간 누구도 올라가 보지 못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수미산에 관을 가지고 가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수미산을 참회의 공간으로 선택한 것은 그만큼 강력한 참회 의지를 나타내기 위한 장치다.
이 시는 시의식의 정결성을 잘 보여준다. “알몸으로/ 내 빈 관을 끌고 끝까지 산정으로 올라가리라”에서 보듯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자아 본연의 모습으로 관을 끌고 간다. 이 정결성은 끝까지 산에 오르는 치열함으로 인해 순전하게 된다. 치열한 정결성이 시가 진실성을 획득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같은 제목의 다른 시 「나의 수미산」에서도 “인간의 작은 탑 하나 세우기 위해/ 평생 동안 다시 산을 오른다/ 발도 없이 손도 없이 산을 오른다”고 해 정결성과 치열함이 참회의 간절함을 강화한다.
이 시에서 관은 참회와 자기 파괴의 공간이다. 죽음의 관찰자나 장례의 참여자로서 바라보는 관이 아니라, 자기 죽음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택한 관이다.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관을 챙기는 비장함을 보여준다. 이 같은 참회는 자기를 파괴해 무의 경지에 다다르도록 한다. 관뚜껑을 다시는 열 수 없도록 단단히 못을 치고 산정의 산정에서 관을 떨어뜨림으로써 더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다. “이미 지은 죄는 깊이 부끄러워하고 아직 짓지 않은 죄는 다시 감히 짓지 않겠다”(已作之罪, 深生慚愧. 所未作者, 更不敢作 -원효의 게송 <大乘六情懺悔>)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다.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그리운 부석사」 부분).

이 시편도 참회의 시다. 새벽이 지나도록 쇠종 소리가 울리지 않는 것은 무법의 현실이며, 마지 공양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도 무법의 현실을 살았다는 고백이다. 이 자각은 고통을 수반하는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눈물 속이나 하늘을 나는 돌 위에 절을 짓는 행위는 탐욕이자 무지이며, 절을 부수는 것은 허상에 대한 분노이자 참회의 한 방식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탐진치에 의한 번뇌에 얽매여있었음을 통렬하게 뉘우친다.
뉘우침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깨달음으로 이어져 허상에 절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지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는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 일”(「지하철을 탄 비구니」)에도 잘 나타난다. 생멸의 변화, 삶과 죽음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기 삶에서의 과오에 대한 참회를 불러낸다. 후회가 아닌 참회인 이유는 뉘우침과 고백, 맹서가 포함되어 있어서다. 오염으로부터 탈피해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맹서가 있어야 구도로 이어진다. 「그리운 부석사」에서 “내”가 참회하는 대상은 “그대”이다. 그대는 “비로자나불”이며 “아미타불”이다. 비로나자불은 모든 부처님의 진신(眞身)으로 진리를 상징하며,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주재하며 법을 설한다. 부처는 진리를 깨달은 자를 뜻하므로 첫 행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서 사랑하라고 한 대상은 진리이며, 이 시는 진리를 깨우칠 때까지 인내하고 사랑하라고 역설한다.

구도, 본성을 찾아가는 길

참회는 구도의 문제로 연결된다. 시적 화자는 만해 한용운이 만년에 지낸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 가서 소를 찾는다. 불성, 곧 인간의 본성을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인 한용운에게서 찾는 것이다. 불교에서 소는 심우도(尋牛圖)에서 보듯 인간의 본성, 또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매개체이다. 심우도는 중국 송나라 곽암(廓庵)이 지은 도해(圖解)가 대표적이다. 동자가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선화(禪畵)로 심우(尋牛)에서 입전수수(入廛垂手)까지 열 단계로 이뤄진다.
심우도의 첫 단계인 심우는 동자가 아득한 수풀 헤치고 소를 찾아 산속을 헤매는 모습을 그린다. 발심한 수행자가 처음으로 본성을 찾아 나선 것이다. 만해가 거처를 심우장이라 명명한 데서 구도에 정진해온 그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다. 시적 화자는 구도자 만해를 찾아간다. 하지만 심우장에는 소가 없다. “향나무에 푸른 고삐만 매여 있다/ 나는 고삐를 풀어 손에 꼭 쥐고/ 당신이 타고 가신/ 소를 찾아/ 성북동 골목을 평생 돌아다닌다”(「심우장에 가다」 부분). 만해는 일제강점의 난국을 타개하려고 한 독립운동가이자 진리의 구도자이다. 하지만 화자는 심우장과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에서 소를 찾지 못한다. 첫 공간에서 심우에 실패한 화자는 광화문으로 나간다.
화자가 광화문으로 나간 것은 공간의 이동뿐만 아니라, 시간의 변화를 의미한다. 만해가 심우장에 살던 1930~40년대의 상황을 현재에 옮겨 놓는다. 오늘날도 당시 피식민의 상황과 별다르지 않다는 인식이다. 광화문에 워낭소리 울리며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뒤를 신발 벗고 따라가/ 그 사람의 소가 될 것”(「광화문에서」, 『밥값』)이라고 해 모든 것을 버리고 진리의 구도자를 따르겠다고 한다. 소가 광화문에 있다고 여긴 것은 광화문이 현재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발견한 광화문은 칼과 총소리가 나는 공간이다. “칼이 꽃이 되고 총이 낙엽이 되고/ 대포도 미사일도 가을 대봉감이 되어/ 총소리란 총소리는 모두 어머니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진리를 말할 때다”(「광화문에서」 부분, 『당신을 찾아서』). 이 시는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을 끝내야 한다는 외침이다. “때다”를 여덟 번 반복함으로써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이러한 상황의 전복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총칼 앞에서 침묵을 그만두고 등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가야 하는 이유는 “이제는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진실 때문에 아무도 배고프지 않도록/ 평화의 벼꽃이 다시 피기를 기다”리기 위해서다. 「광화문에서」 두 편을 결합하면 2010년대 광화문에서 소를 찾는 것은 현실의 진리를 찾는 행위이며, 소를 몰고 간 만해와 같이 평화의 방법론을 지향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시적 화자가 광화문에서 소를 찾는 이유는 세계의 부정성을 딛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실천적 행위를 요청하는 것이다. 정호승은 이 같은 사회적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구도도 모색한다.

늦은 저녁
들녘의 풀을 뜯어 먹던 진흙소가
노을을 등에 지고
외양간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쑤어준 여물을 먹다가
물끄러미
웃으면서 나를 바라본다
나 이 세상 사는 동안
더이상 배고프지 않으리
- 「진흙소」 전문

이 시는 심우도의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단계인 기우귀가(騎牛歸家)와 망우존인(忘牛存人)을 연상시킨다. 기우귀가는 동자가 잘 길든 소를 타고 한가로이 본성의 집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기우귀가에서 소가 완전히 흰색으로 변하는데, 이것은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한 본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지만 「진흙소」는 완전히 본성을 회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들녘에서 외양간으로, 풀에서 여물로 바뀌는데 소가 남아 있다면 진리는 고정된 것이 되어버린다. 오히려 퇴보를 뜻하게 된다. 다행히 화자는 집에 돌아와 여물을 먹는 소에 자신을 이입함으로써 소의 배부름이 나의 배부름이 되며, 소는 사라지고 사람만 남는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남아 있어 대오각성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심우도의 여덟 번째 단계로 소도 사람도 사라지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 되어야 주객이 모두 사라져 빈자리(空)가 된다. 완전한 소멸 후 생성이 가능하듯 빈자리는 구도가 시작되는 자리이다.

해질 무렵
양평 두물머리 강가에 다다른 진흙소가
강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강을 건너간다
나는 고요히 연꽃 한송이 들고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진흙소를 따라
당신에게 가는 강을 건너간다
수종사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
-「두물머리」 전문

이 시는 본성을 찾아가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는데, 소의 등에 타지 않고 진흙소의 뒤를 따른다. 시가 회화적이다. 해 질 무렵,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 진흙소, 저쪽에 사찰이 있다. 강가에 진흙소의 “울음소리”와 강 건너 사찰의 “종소리”가 들린다. 이 회화에 시적 화자가 끼어든다. “나”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기 위해 진흙소를 앞세운다. 열반의 구도자를 상징하는 진흙소를 따라 진리와 불성을 상징하는 연꽃을 들고 강을 건넘으로써 구도시의 미학이 짙어진다.

불교적 상상력에서 소는 진여(眞如)의 상징이며, 진흙소는 부처가 절대 경지에 이른 삼매(三昧) 속에 녹는 마음이다. 진여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실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하며, 삼매는 마음을 평정하게 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과정, 혹은 대상과 하나 되어 마음이 통일된 경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진흙소의 울음소리(泥牛吼)’3)는 참선의 이치에 관한 가르침의 소리이다. 이는 경허 선사의 법어로, 이치로 헤아릴 수 없는 화두를 가지고 탐구하기를 권하는 글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니 청정무구와 열반의 경지를 상징하는 연꽃을 들고 진흙소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따라가는 행위는 중생이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잃어버린 진여의 마음을 찾으려는 구도이다. 「진흙소」보다 「두물머리」가 더 능동적인 실천을 촉구하는데, 드디어 나를 비운 무(無)에서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 「두물머리」에서 “나”는 고뇌로 가득 찬 현대인으로 속세의 중생이며, “당신”은 해탈의 세상에 있는 부처이며 열반의 경지이다.

개안, 성숙한 삶으로의 빛

구도의 궁극에는 개안(開眼)이 있다. 불교에서 개안은 진리를 깨닫는 일이다.

심안(心眼)은커녕
평생 눈을 못 뜨고 살았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점안해주세요
점안의 등불을 환히 밝혀 들고
단 한번이라도 당신을 뵙고
실컷 울고 나서
영원히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점안(點眼)」 부분

「점안(點眼)」은 개안을 간구하는 구도의 시다. 점안은 보통 눈에 안약을 넣는 것을 일컫지만, 불교에서는 불상을 만들거나 불화를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는 일이다. 깨달음의 완성을 의미한다. 욕망으로 인해 어두워진 눈동자에 진리의 붓으로 자비의 먹물을 찍어 깨달음을 얻게 한다. 어둠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지 못했으므로 점안을 해서 광명의 세상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

“당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단 한번이라도” 보아야 하는 자비의 존재이며 구도의 목적이다. 그렇다고 고정되어 기다리는 구도가 아니다. 형벌의 끝이 지옥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윤회하므로 영원한 지옥은 없다. 지옥에 갇혀 소멸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영원히 지옥으로 가겠”다는 것은 계속해서 참회하고 구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수사다.
이 시는 개안으로 새롭게 태어나 진리의 등불을 환히 밝혀 들고 건강한 사회에서 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운명애에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정호승 시는 죽음과 생명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참회에서 구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긍정의 시학을 찾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려는, 소멸에서 생성을 향해 성실하게 이행하는 세계관을 보이기 때문이다.

내 죽어 범어천 냇가의 진흙이 되면
그 흙으로 황소 한마리 만들어
가끔 그 소를 타고 우리집에 가주렴
우리집 꽃밭에 수선화는 아직 피는지
남향받이 창가에 놓아둔 춘란이
아직도 꽃을 피우지 않고 애태우는지
대문 곁 우물가 높은 감나무 가지 위에
새들은 날아와 나를 기다리는지
병든 노모는 오늘도 진지를 잘 드셨는지
가끔 가서 살펴봐주렴
내 죽어 범어천 개울가의 진흙이 되어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봄이 오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벗에게」 전문

이 시보다 20여 년 앞서 발표한 「벗에게 부탁함」을 떠오르게 한다. 두 시편 모두 벗에게 요청하는 형식인데, 시간의 경과에 따른 요청사항의 변모를 잘 보여준다. 「벗에게 부탁함」은 생전이 시간 배경이다. 화자는 자신이 욕먹을 짓을 하더라도 새‧나무‧꽃‧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해달라고 요청한다. 요청의 근거는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어서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려는 이유를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부터 보여”(「꽃이 먼저 핀다」)주기 위해서라고 하며, 그것이 참으로 순수한 열정이라고 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새, 나무, 꽃, 봄비에 빗대어 욕을 해달라는 요청은 자기 죄를 스스로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죄의 대가를 가볍게 하거나 혹은 죗값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무의식의 콤플렉스’4)에 해당한다.

「벗에게」에서는 보다 성숙한 삶과 죽음의 태도를 보인다. 범어천은 정호승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대구에 있는 하천이다. 화자가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는 회귀를 통해 자신을 순수의 지경에 두려는 의도를 지닌다. 1~3행은 “가주렴”의 요청과 함께 벗에게 집으로 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우선 화자가 죽어 고향 냇가의 진흙이 되어야 하고, 벗이 그 흙으로 소를 만들어야 하고, 그 진흙소를 타고 집으로 가야 한다. 진흙은 진리나 열반의 토대가 되는 질료이며, 진흙소는 구도의 실천자를 상징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4~10행은 “살펴봐주렴”이 지시하는 사항을 제시한다. 수선화와 춘란이 꽃을 제때 피우는지, 새들이 나를 기다리는지, 노모의 안부를 살피는 일이다. 어찌 이것뿐일까. 일상의 모든 것이 질서 있고 무사한지 궁금한 게 많다. 11~13행은 벗이 나의 집으로 가는 행위의 요건을 더욱 강화한다. 진흙이 될 뿐만 아니라,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불가능함에 더욱 불가능한 요건을 제시한다. 살펴봐달라고 요청하지만, 사실은 살펴볼 필요 없을 만큼 사소한 일상이다. 이 또한 역설이다. 만일 텍스트 그대로 읽으면 어렵사리 구도자가 되어 겨우 생전의 일상사를 보살펴달라는 요청인데, 그 자체가 집착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 시는 생전의 자신이 사후의 자신에게 요청하는 형식을 통해 현재 자신의 의지를 강화하는 죽음의 역설이다. 텍스트에서 행위 지시의 대상은 벗인데, 벗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을 뜻한다. 화자는 행위 지시자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스스로 진흙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봄이 오는 소리를 낼 때 행위를 하라고 한다. 화자는 어느덧 실천적 구도의 행위를 스스로 창조해나가려는 주권적 인간으로 성숙해 있다.

가다, 운명애의 실천

주권적 인간은 자유의지로 행위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실천을 요구하며, 이는 곧 구도에의 정진이다. 구도 시는 진흙소를 모티프로 하는데, 이들 시편에서 사건의 지배소는 ‘가다’이다.

당신이 타고 가신/ 소를 찾아/ 성북동 골목을 평생 돌아다닌다
-「심우장에 가다」 부분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중략- 나는 그 뒤를 신발 벗고 따라가/ 그 사람의 소가 될 것이다
-「광화문에서」 부분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진흙소를 따라/ 당신에게 가는 강을 건너간다
-「두물머리」 부분

가끔 그 소를 타고 우리집에 가주렴
-「벗에게」 부분

‘가다’는 어느 개체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과정이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변화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가다’는 동사이므로 이 과정의 바탕 개념에는 움직이는 개체, 지시동사의 기준점인 출발지, 경로, 도착지가 있다.5)

「심우장에 가다」에서 움직이는 요건은 “봄이 와서”이다. 출발지는 드러나 있지 않고 도착지는 심우장이다. 심우장에 소가 없자 새로운 출발지는 심우장이 되고 도착지는 소가 있는 곳으로 연장된다. 이동 방법은 집 안 구석구석 살피고 골목을 돌아다닌다. 「광화문에서」에서 이동 주체는 “나”이다. 출발지는 광화문이며 도착지는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목적은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의 소가 되는 것이며, 이동 방법은 신발을 벗고 찾아 나선다. 「두물머리」에서 출발지는 진흙소가 다다른 두물머리 강가이며, 목적지는 강 저편의 당신이다. 찾아가는 방법은 진흙소를 따라 강을 건너는 것이다. 「벗에게」에서 이동 주체는 “나의 벗”이다. 출발지점은 범어천이며, 목적지는 내가 살던 집이다. 목적은 심우도의 기우귀가처럼 본성의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과 회귀이며, 이동 방법은 진흙소를 타고 가는 것이다. 출발 요건은 내가 죽어 진흙이 되는 것이다.
인용한 네 편의 시에서 주체는 모두 무엇을 찾아가는데 그것은 소, 소를 모는 사람, 당신, 내 집이다. 곧, 깨달음을 구하는 자, 깨달은 자, 깨달은 자의 공간이다. 이동 방법은 발, 맨발, 소에 타고서다. 여기에서 ‘가다’는 “지옥으로 가겠”(「점안(點眼)」)다는 비장한 각오로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구도의 시에서 화자는 주체화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나”와 “당신”의 거리이다. 「심우장에 가다」와 「광화문에서」는 내게 당신은 비가시적인 존재이며, 「두물머리」에서는 당신이 눈앞에 있는 가시적 존재이다. 「벗에게」에서 벗을 당신으로 치환하면, 당신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없애는 초월적 존재가 된다. 이렇듯 화자는 집, 골목, 광장, 강, 하천 등 곳곳에서 당신을 만나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구도의 길이 여러 가지이며, 또 한편으로는 당신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구도는 관조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다’를 실천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살펴본 대로 정호승 시는 타락의 자각에서 참회, 구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모두 단호한 실천 의지를 드러낸다. 구도와 운명애의 실천으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려고 하며, 이는 자기 의지로 영위하는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움은 삶에 눌어붙은 고통을 극복”6)하도록 한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에게 고통은 시적 본능이다. 정호승 시는 고통의 한계에 직면해서도 그 너머를 욕망하는 의지, 특히 인간다운 삶을 지향해 가는 과정에 구도의 실천이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정호승의 반세기 시력(詩歷)을 관류하는 핵심어는 고통과 사랑이다. 고통은 그의 현실인식이며, 그에게 시는 세계의 부정과 모순에 대응하는 한 행태이다. 그 지향점에 사랑이 놓인다. 고통에서 사랑을 향해 가는 도정은 진흙소를 모티프로 하는 구도적 상상력으로 형상화되는데, 이는 부정의 세계에서 고통의 체험을 승화시켜 긍정의 세계로 전환하려는 기획이라고 하겠다.

【각주】
1)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9, 295쪽. 
2) 권기현, 「불교예술에 나타난 연꽃의 상징성 연구」, 『밀교학보』 8권, 밀교문화연구원, 2006, 115~116쪽.
3) 경허 성우, 『경허집』, 이상하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16, 84~88쪽. 
4) 이부영, 『그림자』, 한길사, 1999, 90쪽.
5) 이기동, 「[동사-어 가다]의 구조」, 『담화와인지』 3권, 담화인지언어학회, 1996, 86~87쪽.
6)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14, 207~208쪽.

【심사평】 정호승 시 저류에 흐르는 가능성 긍정적 비평
 

 

2024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는 많은 응모작들이 접수되었다. 불교 관련 담론 비평 등이 제법 많았고 다양한 작가, 시인, 현상, 사건 등을 저마다의 시선과 필치로 탐구하여 비평적 논의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사례들도 반가웠다. 심사위원은 담론 추수나 이론 현시를 보이는 현학적 비평보다는 작품의 형상과 논리를 충실하게 읽어내어 그것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한 글에 호감을 가지고 응모작들을 읽어나갔다. 그 결과, 스스로의 해석적 언어에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사이채 씨의 평론 ‘진흙소 모티프로 긍정의 세계 기획 – 정호승론’을 가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 비평문은 안정감을 가지고 한 시인의 시세계를 정치하게 분석한 결과였다. 정호승 시의 독특한 개성을 불교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앞으로 불교적 시 비평을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시인이 고통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진흙소를 모티프로 하는 구도적 상상력으로 구명한 의미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호승 시의 저류에 흐르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읽어낸 따듯한 비평이라고 생각된다. 필력을 더욱 가다듬어 불교적 관점에서 수행하는 분석과 해석의 역량을 크게 보여주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이번에 당선하지는 못했으나 문제의식을 충분히 갖춘 비평적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하고자 한다. 다음 기회에 더 빛나는 결과를 얻기를 충심으로 바라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수상소감】 시를 말하는 일 세계부정에 대응하는 나의 방식

 

곧 눈이 올 테지. 이 겨울엔 팔 몇이나 잘려 눈에 묻힐까. 아직 잘려 나가지 못한 내 팔이 부끄러워 뒤로 감춘다. 설광(雪光)에 뛰어들 만큼 좋은 날에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은 좌절의 습관일까, 설중단비(雪中斷臂) 피해 다니느라 뭉툭해진 팔을 내놓기 창피해서일까. 소욕(少欲)으로 지족(知足)하라건 만 내 글은 점점 살이 찐다.

산다는 것이 쓴다는 것이라는 둥 과대한 변명 몇을 책상에 올려놓고 삶을 쓴다. 일상의 틈마다 사유를 끼워 넣거나 언어의 균열을 노리다 보면 언젠간 의미 하나 붙들겠지, 하며.

시가 고통의 현실 인식이듯, 시를 말하는 일은 세계의 부정에 대응하는 나의 방식이다. 문학의 궁극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으며, 거기에 사람다운 삶이 있을 테다. 그래서 미를 드러내고 추를 도려내는, 그 도정에 내 글이 놓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글에 군더더기 띄지 않는 날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으려나.

〈프로필〉
-충남대학교 문학박사.
-장편소설 《잠들지 않는 물고기처럼》, 《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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