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1호(2014년 4월 10일자) 태고칼럼

▲ 총무원 종무위원 송월스님
길가에 핀 한 송이의 풀꽃, 허공을 나는 작은 새 한 마리도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교직(交織)된 인연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이러한 중생의 삶을 “방편으로 말씀하신 법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묻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하였는데 냄비처럼 금방 뜨거웠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그런 따위의 믿음이나 수행은 안달하는 모습들이라 궁극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일 것이다.
근자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법을 지키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요, 어기는 것은 높은 사람들이 아닌 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회기강이 많이 해이해짐을 보여주는 기사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탈세를 하는가 하면 폭력을 막아야 할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이래 가지고야 법이 법답게 지켜질 리가 없다.
양심적인 사람보다 비양심적인 사람이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떵떵거리며 행세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 사회의 앞날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걱정이 안 들 수가 없다. 우리 종단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종도가 떠안아야 할 태산 같은 종단부채라든가, 출범한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현 집행부가 해결해야 할 골머리 아픈 여러 현안들은 모두가 그 동안 관행적으로 또는 즉흥적으로, 시쳇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일이 처리되었기에 만들어진 일들이다. 종단 내부에서 지금 어떻게 제도가 시행돼 가고 어떤 일이 벌어지든 관심 밖으로 나 몰라라 했던 종도들의 무관심도 큰 문제였다고 여겨진다.
현대인들은, 특히 한국인들은 일을 도모함에 있어 성급하게 결과만을 기대하는 나머지 거쳐야할 과정과 절차를 대충 하거나 뛰어 넘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성과주의에만 매달리는 이 같은 사고는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패를 초래하고야 만다. ‘졸속 성과주의’는 근원적으로 턱없는 이기심에서 생기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절차를 지키고 과정을 소중히 하는,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거나 조롱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양심이니 도덕이니를 따지고 들먹이는 일 자체를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어떻게든 큰 성과를 내면 된다 라는 사고방식이 만연돼 있다.
양심이란 원래 윤리적인 용어다. 남과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가져야 할 바른 마음가짐이 양심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양심을 갖지 않는다면 비록 외양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마치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와 같다. 허수아비도 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서 있어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허수아비를 우리가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그의 가슴에 사람과 같은 ‘살아있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허수아비는 가슴이 온통 지푸라기로 가득 차 있으므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가. 겉모습만 본다면 요즘처럼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 세상도 드물다. 그들은 ‘허영’의 모자를 쓰고 ‘속임수’의 옷을 입고 으스댄다. 양심은 없고 ‘허영’의 모자를 쓰고 ‘속임수’의 옷을 입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라도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을 하면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고 부러움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는 되돌아 볼 일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방에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서 세상을 살라 하였거늘 우리 불자들마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래도 허수아비가 사람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가슴에 따뜻한 정은 없어 지푸라기로 가득 찼지만 남을 속이거나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분노하거나 뒷전에서 욕심을 채우려고는 않기 때문이다.
준법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로 ‘소크라테스의 약사발’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의 약사발을 받기 전 도망칠 수도 있었으나 “악법(惡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 며 독약이 든 약사발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약사발’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비록 그 법이 악법이라 하더라도 평등했는가 하는 점이다.
법이 법답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누구는 터럭만한 잘못을 해도 엄한 규제를 받는데 누구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미미한 처벌밖에 받지 않는다면 있으나마나한 법인 것이다.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 법일지라도 평등한 법이냐고 따지는 것은 법철학적인 문제이고 공정하게 집행되는 법은 일단 지켜야 옳다.
이처럼 우리 종단의 현안 문제들도 과감히 그리고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법의 절차에 따라서 집행부는 ‘목숨’ 마저 내놓을 정도로 과감하고 공정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과거에 잘못돼 오던 관행을 종식시킬 수 있다. 구차한 변명 따위는 모두 내려놓고 말이다. 종도들은 모든 행정이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발벗고 나서서 지원해주고 뒷받침 해주어야 종단이 개혁이 된다.
사람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곳은 어디를 막론하고 지켜야할 규범이 있고 실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모두의 이익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법과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현실은 법과 규칙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고 안정되며 목표로 한 사업이 성공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계율은 준법에 의한 승단 구성원의 조화롭고 질서있는 생활을 위한 규범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무사한 것이 특징이다. 한번 정해진 계율 앞에서는 부처님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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