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⑨

善知識 此義卽是惠等 學道之人作意 莫言先定發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口說善 心不善
惠定不等 心口俱善 內外一種 定惠即等 自悟修行
不在口諍 若諍先後 即是迷人 不斷勝負却 生法我
不離四相

선지식아! 이 뜻은 지혜는 평등하다는 말이다. 도를 배우는 자는 마음을 지어 먼저 선정(禪定)에 들어야 지혜를 발현된다고 하거나 혜(慧)가 우선하여 정이 발현된다고 정혜(定慧)를 구분 짓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견해를 짓는 자에게는 법에 두 가지 상이 있게 되는 것이어서 입으로는 선(善)을 설하지만 마음에는 선(善)이 아니기에 정혜(定慧)가 같지 않게 된다. 마음과 입이 선(善)으로 구족 되면 안팎으로 하나가 되어 정혜(定慧)가 즉시 같게(동등) 된다. 스스로 돌이키는 수행을 하면 입 가지고 다투는 일이 없다. 만일 선후를 논쟁한다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승부욕을 끊지 못하면 법에 아상(我想)이 생겨서 사상(四相)을 여읠 수 없게 된다.

 

혜능의 법문이 정(定)과 혜(慧)를 근본으로 하는 지관(止觀)쌍수를 의미한다. 정(定)은 삼매고 혜(慧)는 위빠사나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이 둘이 서로 나뉘어져 수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자웅동체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사량분별을 넘을 수 없다. 지혜를 얻고자 하거든 선정에 드는 일을 하면 된다. 선정에 들게 되면 기존에 삼사화합1)의 현상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게 된다. 에고(ego)의 의식작용이 배제되거나 일시적 소멸이 일어나서 대상을 자기식대로 보고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여실지견(如實知見)2)할 수 있는 토대이다. 지혜의 작용은 이를 토대로 일어난다. 지혜는 유위(有爲)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존재의 실체가 드러나는 현상이다. 지혜는 생각을 지어내고 의도를 담고 대상을 대하지 않는다. 다만 선정에 들기 위해서 도입 단계에서는 유위적인 노력이 수반되지만 일단 정(定)에 들어서게 되면 그곳에는 작위(作爲)가 없어서 지혜라는 작용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이기에 단지 발견되는 것이고 번뇌는 본성(本性)에 귀의하게 된다. 마치 파도가 인(因)이나 연(緣)중에 어느 하나만 소멸되면 다시 바다가 되듯이 말이다.

一行三味者 於一切時中 行住座臥常眞 眞心是爭(淨)名經云
眞心是道場 眞心是爭(淨)土 莫心行諮曲
口說法直 口說一行三昧 不行眞心 非佛弟子 但行眞心
於一切法 無上有執着 名一行三昧

일행삼매라는 것은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중에 행하고 머물고, 앉고 누울 때 항상 참됨이 된다. 참된 마음(:眞心)은 『정명경』3)에서 말하기를 ‘진심은 도의 장(場)이고 정토이다. 마음에선 아첨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하면서 입으로는 바른 법을 설하려 하지 마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고 행동은 참된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없다. 다만 참된 마음으로 행하라.’ 했다. 일체법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이 없음을 일행 삼매라 말한다.

일행삼매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삼매를 연상할 때 마음이 완전히 정적인 상태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돈황본에서 주장하는 삼매는 그처럼 단편적이지 않다. 보다 역동적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일상생활)에 항상 진실[:眞]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뜀틀에 임했을 때는 뛰는 일에 집중해야 하고 고요히 앉아야 할 때는 정적이어야 한다. 삼매(=선정)라고 하여 정적으로 고요함만을 고집한다면 진정한 삼매가 될 수 없다. ‘일체법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이 없으면 일행삼매’라 하였다. 이것은 중도(中道)의 가치관이다. 중도 또한 연기(緣起)의 현상이다. 일행삼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아울러 일행삼매를 설할 때에도 안과 밖이 차이가 없게 하려면 먼저 일상 경계에서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되어야만 가능하다. 특히 말할 때 더욱 알아차림에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말에는 본능적으로 무의식에 잠자고 있던 욕구 불만의 업식(業識)들이 투영돼 나온다. 그래서 혜능은 ‘입으로 말할 때 삼매(:口說一行三昧)’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행자 시절에 묵언수행을 하는 이유도 이런 이치가 있다. 생각이 입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을 성찰할 겨를이 없어 알아차림 할 힘이 둔화된다. 그러나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닫고 있으면 자신의 속마음을 보게 되는 때가 있다. 그 알아차림 순간에 본인의 업식이 개입됐음을 깨닫게 된다. 말을 할 때 알아차림의 힘이 강하게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삼매가 될 수 있다. 알아차림의 강도가 삼매의 질을 결정한다. 삼매란 아무런 의식작용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하고 완벽한 의식작용의 형태를 말한다. 그 상태에는 집착의 현상이 없고 치우친 시선이 없어 전체를 인식하고 전체로써 올곧이 존재하는 완전한 실체이다.

迷人着法相 執一行三昧 眞心座不動 除妄不起心
卽是一行三味 若如是 此法同無情 却是障道因緣
道順通流 何以却滯 心住在卽通流, 住即彼縛
若座不動是 維摩詰不合呵舎利弗宴座林中

미혹한 이는 법상에 집착하여 일행삼매에 집착한다. 진실로 마음의 자리가 움직임이 없으니 망령됨을 제거하려는 마음마저 일으키지 않아 즉시 일행삼매이다. 마치 이와 같으니 이 법문은 정(情)이 없음과 같다. 도의 장애를 물리침을 인연으로 도가 통하여 순리대로 흘러가는데 어찌 막힘을 물리치겠는가!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면 곧 통하여 흐르게 하라. 머무르면 그것에 속박된다. 마치 앉아서 움직임이 없게만 하는 것이 되어 유마힐이 숲속에서 명상하고 있는 사리불을 꾸짖은 것이 합당치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이는 법상(法相)에 집착한다.’ 마음수행에 있어서 이처럼 위대한 가르침은 없다. ‘이것만이 옳다.’라고 기준을 세운 것만큼 큰 어리석음은 없다.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동안 소통은 이뤄지지 않는다. 일방적인 가르침의 폭압만 있을 뿐이다. 어떤 형태든 권력과 힘을 많이 소유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그것은 일종의 열등감이다. 이 열등감이 지식의 화려한 옷을 입으면 법상이 된다. 일행삼매도 붙들면 법상일 뿐이다. ‘진심좌부동(眞心座不動)’ 진실로 마음의 자리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표층의 마음에서는 고뇌의 파도가 휘몰아쳐도 그 마음자리는 고요하여 흔들림이 없는 삼매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마침내는 망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마음마저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그것에 붙들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12연기의 촉(觸)은 3화(三和) 즉 3사화합(三事和合)에서 생겨나는, 즉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에서 생겨나는, 즉 감관[根]과 대상[境]과 마음[識: 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3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나는 마음작용.
2) 인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견해.
3) 유마경(維摩經)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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