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19호(2014년 2월 25일자) 시론

올 겨울은 소치 동계올림픽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쇼트트랙 스케이트 종목에서 눈부신 성적을 거둬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해왔다. 지난 대회까지 한국이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부문에서 딴 금메달은 37개로 캐나다의 25개보다 월등히 많다. 말 그대로 쇼트트랙은 한국의 금메달 밭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올핸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피겨와 스피드스케이트 선수들이 모두 참여해 기대가 컸다. 실제로 2월 11일 이상화가 스피드스케이트 500m 부문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자 전 국민이 환호했다.
쇼트트랙 스케이트 종목이 시작되면서 수상쩍은 웅성거림이 감지되었다. 한국 쇼트트랙의 영웅이 러시아선수로 뛴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려졌지만, 그가 예전의 기량을 보이며 승승장구하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범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선수들이 잇단 불운과 실력 차이로 메달권에서 멀어지고 안현수는 보란 듯이 1위로 골인하며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빙판에 엎드려 오열하다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감동과 탄식, 환희와 분노의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왜 안현수가 러시아 선수로 금메달을 따게 되었는지 추적하면서 빙상연맹과 특정인이 국민의 몰매를 맞는 상황이 벌어졌다.
‘안현수 러시아 귀화’는 각 언론과 인터넷에서 워낙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종을 이루는 것은 안현수를 키우고 내친 옛 스승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격렬한 비난과 안현수 역시 수혜자였다는 일부의 반론이다. 그런데 이 상반된 주장의 원인제공자가 동일인이라는 데 이번 사태의 본질이 있다.
그는 능력 있는 제자를 편애하여 세계 최고로 키웠다가 자기 말을 따르지 않자 냉혹하게 내쳤다는 점 때문에 뒤늦게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쇼트트랙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던 그는 한 순간 한국빙상계의 모든 비리와 폭력의 원인제공자로 치부되면서 이제까지 쌓아온 명예와 영광을 잃게 될지 모른다. 그의 제자나 후배였던 이들에 따르면 그는 지나치게 독선적이어서 파벌을 만들고 특정선수를 선호 또는 배제하여 쇼트트랙계의 갈등과 불화의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가 ‘쇼트트랙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공적이 많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런데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쇼트트랙 팀이 저조하고 상대적으로 안현수가 재기에 성공하면서 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그에게 문제가 많았다면 진작에 주의를 주고 시정했어야 옳다. 그가 대표팀을 관리하면서 좋은 성적을 낼 땐 모른 척하다가 지금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종기(腫氣)가 발견되면 곧바로 치료해야 상처가 덧나지 않듯, 이번 사태도 파벌다툼이 벌어졌을 때 단호하게 문제의 싹을 잘랐어야 한다. 뛰어난 지도력과 두뇌를 지닌 사람일수록 권력이 집중되면 독선적이 될 우려가 크다는 것은 굳이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올림픽의 의의는 참가하는 데 있다”는 쿠베르탱의 말을 인용한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란 말은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다.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을 통해 나는 메달과 상관없이 자신의 종목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에 감명 받았다. 올림픽에 6차례나 참가하면서도 메달 하나 따지 못한 이규혁의 놀라운 역주, 밴쿠버 올림픽 선수권자였던 모태범의 사력을 다한 질주는 국민 모두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들과 1위와의 차이는 글자 그대로 ‘눈 깜짝 할 사이[瞬間]’에 불과해서, 잠시의 방심이나 집중에 따라 순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만 아쉬워할 뿐, 그들이 500m와 1000m를 달리며 폐가 찢어지고 근육이 마비되는 듯한 아픔을 참고 견딘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모태범은 평소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게 아니라 상대자들이 너무 잘했기 때문에 메달을 따지 못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4년 뒤 얼마나 성장할 것인지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김연아, 이상화, 모태범, 안현수 등은 이십대에 세계 최고가 되었다. 세계 최고의 영광과 환희를 경험한 그들이 운동을 그만두고 새 환경에 적응하기에 이십대는 너무 젊거나 늦은 나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기회를 주면 후배가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며 고령화 사회를 맞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통과 제의의 하나인지 모른다. 안현수는 한때의 성공과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에 성공한 젊은이의 모델로 거론되면 충분하다. 미국에 유학 가 시민권을 획득한 뒤 성공한 사례가 미담이 되었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능력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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