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정리-5차 학술대회 발표 및 논평

한국불교태고종은 2020년부터 4회에 걸쳐 개최한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를 열어, 외부로부터 태고종의 정체성과 사상 그리고 전통을 심도 있게 조명하고 태고종의 미래를 탐구하는 새로운 시작이자 도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태고종의 뿌리와 전승을 모르고는 종단의 밝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태고종이라는 종명의 근원을 이루는 태고보우 선사의 사상과 정신을 바로 이해해야 함은 태고 법손의 의무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 열린 학술대회 역시 ‘태고보우국사의 사상적 형성과 전개’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국사의 선(禪)사상과 개혁 등을 연구함으로써 태고보우국사의 위상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알게 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에 이날 전문 학자 4명의 발표 논문과 토론자의 논평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한국불교 주류 간화선 계승에 결정적 역할

김진무 교수
김진무 교수

 

중국 임제종의 법맥(法脈) 전승과 태고 보우 국사의 선사상

제1발표 : 김진무 교수(충남대학교)

석옥청공의 선사상은 바로 《단경》으로부터 비롯된 조사선의 풍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또한 《마조어록》, 《임제어록》 등에서 제시되는 사상을 원용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이 점은 그의 법맥으로부터 보자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청공이 9년 동안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른 간화선의 구체적인 수행법과 관련된 내용은 그의 《어록》에 잘 보이지 않고 있다. 어쩌면 청공은 간화선을 단순히 ‘돈오’에 이르는 제접법으로 파악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그의 《어록》을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추론을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석옥청공은 고려말 쇠락하는 선종을 부흥시키려는 ‘여말삼사’ 가운데 백운경한과 태고보우를 ‘인가’한 스승으로 한국 선종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고려의 선사들이 석옥청공을 찾아 원으로 갔던 원인에는 고려에 와서 활동하던 중국 승려의 추천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선종은 바로 마조선을 계승하였고, 나아가 임제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태고보우는 한국불교, 특히 한국선에 있어서 보조지눌(普照知訥)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다. 한국선의 중흥조로서 태고보우는 이미 원에 가기 이전에 화두 참구를 통하여 개오하였지만, 다시 본색 종사를 찾아서 ‘인가’를 받고자 하였다. 그것은 조사선과 간화선의 특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원에 들어가 석옥청공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귀국 후 석옥과 지속적으로 서신 왕래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논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록》에는 부록으로 석옥청공선사의 서신이 실려 있다. 태고보우의 선사상은 기본적으로 『육조단경』으로부터 마조선과 임제선, 그리고 간화선의 색채가 두드러진다. 그것은 한국선의 시작은 신라말로부터 형성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바로 대부분 마조계를 전승했으며, 그러한 마조선을 적전(嫡伝)한 것이 임제선이고, 다시 임제선을 계승한 것이 바로 간화선이라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는 간화선이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태고보우 선사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태고보우의 한국적 특성 탐구 기초 제공

조윤경 교수
조윤경 교수

 

논평/ 조윤경 교수(안동대학교)

김진무 선생님의 「중국 임제종의 법맥 전승과 태고 보우의 선사상」에서는 태고보우와 그의 스승인 석옥청공의 선사상이 시대적, 지역적 요구에 어떻게 응답하며 변화하고 발전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돈오론(頓悟論), 조사선(祖師禪), 간화선(看話禪)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을 구체적인 해설을 통해 상세하게 전개하고 있는 논문이다. 특히, 선학을 전공하지 않은 논평자로서는 논문의 곳곳에서 중국불교사상사의 전개와 관련해 많은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논문은 도생(道生),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석옥청공(石屋淸珙, 1270~1352),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8)의 ‘돈오’를 관통하는 선 사상이 무엇인지에 관해 깊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친절하게 해석하고 있다. 방대한 주제를 탐구하면서도 논문의 구석구석에 중국불교의 핵심 사상과 개념을 짚고 있어서 짧은 논평문에 이들을 모두 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논문을 읽는 내내 임제종 선사들의 자신감과 패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선 사상의 흐름에 관한 통시적인 연구를 토대로 중국 임제종(臨濟宗)에서 전승되었던 선풍이 한국불교 태고보우를 통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논문의 끝부분에서 언급한 “태고보우의 한국적 특성과 주체성”을 탐구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길이 없는 길(無路之路)’이 곧 태고종도의 길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원증국사 태고보우의 위상

김방룡 교수
김방룡 교수

 

제2발표 : 김방룡 교수(충남대학교)

태고가 역사적으로 한국불교사에서 대단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현 태고종의 정통성과 전통성을 곧바로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태고’는 현 태고종의 종조일 뿐만 아니라 조계종의 중흥조이며 아울러 ‘임제-태고법통설’에 근거하여 법맥을 전수한 수많은 종단 승려들이 태고의 법손(法孫)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태고를 종조로 추앙하고 있는 현 불교교단은 태고종뿐만 아니라 여러 종단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고종 종정을 지낸 덕암 큰스님은 “태고는 관행지혜로 자각한 선각자요, 임제종맥을 계승해온 동방의 초조이다. 원융회통과 돈오돈수의 태고선풍은 불조와 동일한 각행원만의 대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태고종의 입장에서 종조 태고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태고는 스스로 깨닫고, 인가를 통해 조계와 임제의 남종선의 정맥을 계승하였으며, 그를 통해 동방의 초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세계가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말한 각행원만의 대도라는 점이다. 태고종의 종도들은 바로 이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태고의 사상적 정체성은 그 핵심이 간화선에 있는데, 과연 현 태고종이 그러한 태고의 사상을 따르고 있거나, 앞으로 따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또 ‘만약 태고종의 종지 종풍을 확고하게 정립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통하여 급변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현실 교단을 지탱하고 나아가 발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모순과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 이 ‘사태’ 앞에 태고종의 지도자는 물론 종단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든 종도들은 누구도 시원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길이 보이지 않고, 더 자세히 보면 길은 없다. 그러나 ‘길이 없는 길(無路之路)’이야 말로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걸었던 길이고, 또 ‘견성성불 전법도생’을 목표로 하는 태고종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길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한 발을 내딛으면 그것이 길이 되고, 길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길 아닌 길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수행 풍토도 계승해야 할 ‘전통’

김용태 교수
김용태 교수

 

논평 : 김용태 교수(동국대 불교학술원)

이 논문은 발표자가 “‘태고종의 입장에서 종조 태고의 사상을 어떻게 이해·해석해야 하고, 또 현실 교단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라고 밝혔듯이, 종조로서 태고 보우의 사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 것이다. 이는 현재 태고종 종헌에서 태고의 사상을 “제종(諸宗) 포섭에 의한 선교불이(禪敎不二)·이사무애(理事無.)의 원융(圓融) 종풍(宗風)”이라고 정의한 것이 ‘임제 태고 법통설’이 확립된 조선 후기 이후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며, 14세기에 활동했던 태고 보우의 실제 사상과는 괴리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논평자는 조선 시대 불교사 전공자로서 태고 당시와 후대의 인식 사이에는 간극과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다만 17세기 이후 법통상의 조사로서 ‘역사화’ 된 태고의 위상을 전제로, 선과 교, 나아가 염불까지 종합하는 조선 후기 불교계의 수행 풍토도 계승해야 할 ‘전통’이며, 그 연장선에서 ‘제종 포섭과 선교불이’를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려후기 이래 보우에 의해 한양 천도 부각

태고 보우의 불교 개혁과 의의-신돈의 개혁과 나옹의 흥법과 관련하에

황인규 교수
황인규 교수

 

제3발표 : 황인규 교수(동국대학교)

보우의 불교 개혁은 수선사 결사를 전개하였던 사굴산문계 수선사의 세력을 계승한 것이었다. 혼원 이후 수선사 사주로서 처음 왕사로 책봉된 각엄국사 복구는 수선사 13세 사주이면서 사굴산문의 수장이었다. 보우는 왕사에 책봉되면서 불교계 개혁을 다시 시도하였다. 1356년(공민왕 5) 무렵부터 반원 자주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였고 복구가 입적하자 보우를 왕사로 책봉하고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게 하였다.

보우는 원에서 귀국한 후 백장청규(百丈淸規)로서 불교계의 종풍을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장청규》의 강조이며, 《치문경훈》을 간행하고자 한 것이다. 보우는 원융부에서 불교개혁으로 9산문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9산문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여 저 구산(九山)을 인아(人我)의 산으로 만들지 말고 산 이름을 도존(道存)이라 하여 모두 한 부처의 마음에서 나와 물과 젖이 서로 화합하듯 한 가지로 평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보우는 신돈(辛旽)이 집권한 1365년 이후 불교계에 이렇다고 할 시책을 펴지 못하였다. 보우의 9산선문 통합의 노력은 불교계 전체나 사상계 전체의 흐름 속에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국도 후보지로서 충주도 부각되었는데 신돈이 정계를 집권하고 불교계를 장악하면서 그의 하수인 이춘부를 시켜 충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51세) 1월 1일 사도(使徒) 달예(達睿)가 지공(指空)의 영골(靈骨)과 사리를 받들고 고려에 오는 계기로 나옹이 불교계 전면에 급부상하게 된다. 나옹과 문도 무학이 지공으로부터 원에서 삼산양수기(三山兩水記)를 받아와서 양주 회암사를 흥법의 터를 삼아 불교를 중흥하고자 하였다. 한양의 도성 밖은 주로 양주(楊州)에 속하였는데, 양주의 회암사가 삼화상(三和尙)의 도량이 된 것 자체가 한양 천도와 관련이 깊다. 즉, 나옹과 그의 상수제자 무학에 의해 근기 지방인 양주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 중흥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한양은 본래 양주의 남쪽부분으로서 우왕대 삼소(三蘇) 중에 좌소(左蘇)가 회암사 터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결국 고려후기 이래, 특히 보우에 의해 한양 천도가 부각되었으며 조선국초 무학자초의 한양(漢)陽 전도(奠都)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정치세력과 관련성도 염두에 둘 필요

박용진 교수
박용진 교수

 

논평/박용진 교수(국민대학교)

이 논문은 공민왕대 등용된 신돈의 개혁과 나옹의 흥법 등 고려말 불교계 고승들의 동향과 연계하여 보우의 공민왕대 불교 개혁과 그 의의를 분석한 논문이다. 특히 본고는 오랜 기간 태고 보우를 연구한 전문 연구자로서 그간의 관련 선행 연구와 논자의 연구를 집적하여 재조명한 논고라 할 수 있다.

발표자는 한양천도에 대해 “보우는 한양의 근기 지방인 용문산 일대의 불교를 기반으로 불교계를 개혁하고 임제선풍의 불교문화를 전개시키고자 하였으며, 고려 중엽부터 부각된 삼소(三蘇) 가운데 하나인 백악산을 중심으로 하는 한양 천도 주장과 연관된 것”으로 정리했다. 또한 “국가적으로는 묘청 이래 36국 조공이라는 호국적 입장에 의거 한양 천도를 주장한 것”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의 통일은 불력에 의한 것으로 오백선찰 창건을 통해 선종을 홍양하였는데, 당시 구산선류가 각 산문의 우열을 다투며 싸우는 현실에 대해 구산문을 1산문으로 통합하고, 선원청규를 통해 정근하고 청정케 하여 선종을 중흥하는 한편 교종의 오교도 그 법을 홍양하면 국가의 조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고려의 전성기를 회복하기 위해 한양으로 천도하고, 선종 구산문의 통합과 교종의 오교 역시 본연의 불법을 넓히는 불교계의 통합과 재편 정책을 통해 국가의 기업을 연장토록 한 것이다. 한편 보우의 한양 천도 주장은 당시 한양 천도를 주장한 정치세력과의 관련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향후 정치세력의 분기와 불교계의 동향을 연계한 분석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중국 임제종풍 전법, 한국선종사에 큰 족적

태고 보우의 인가와 전법에 대한 고찰

김호귀 교수
김호귀 교수

 

제4발표 : 김호귀 교수(동국대학교)

고려 후기에 활약한 태고보우)는 19세 때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로 입참하고 수행하여 38세 때 크게 깨쳤다. 46세 때 원나라에 들어가 석옥청공을 참문하고 인가를 받아 중국의 임제종맥을 계승하였다. 48세 때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辛頓)과 불화가 있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당시에 신돈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계통과 태고를 중심으로 하는 선종의 세력대결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세력과 정치를 배경으로 한 세력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의 태고보우 선사는 한국의 선종사에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면모를 지니고 있다. 보리달마로부터 연원하는 조사선풍의 계승자라는 점, 구산문의 통합을 지향하여 한국선의 면모를 일신하려고 시도했던 점, 임제종풍의 전승자로서 면수와 사법을 실천한 점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보우는 청공으로부터 국내에서 자신이 경험한 깨달음에 대하여 중국 임제종의 정통 조사로부터 증명을 받았고 인가를 받아 불조정전의 법맥을 고려에 전법할 수가 있었다. 이전 신라시대의 입당구법승의 인가와 법맥의 전승이 선종오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선풍이었다면, 보우의 인가와 사법의 전승은 임제종풍의 전법이었다는 점과 차별화된다. 특히 국내에서 몸소 수행과 깨달음을 체험한 연후에 명안종사를 찾아서 입원하여 석옥청공에게서 깨달음에 대하여 전통적인 증명과 인가와 사법을 통하여 고려에 임제종풍을 전법한 것은 보우가 한국선종사에 공헌한 큰 족적이었다. 그로부터 면수와 사법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법의 당위성을 구축해주었다.

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온전하게 보증받는 것은 바로 인가가 없어서는 안 된다. 선지식의 인가를 통하여 비로소 불조정전의 정법안장을 전법하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보우는 고려 말기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불조의 정법을 온전하게 주지하는 길이 명안종사의 인가에 달려있음을 자각하고 몸소 원에 들어가 소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이로써 한국의 선법은 인도로부터 전승되었던 정법안장의 정통성을 명백하게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임제종풍의 전통과 사법을 고스란히 수용하여 고려에서 꽃피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태고보우가 바다를 건너간 까닭은 바로 그것이었다.
 

깨달은 후 석옥과 법거량 통해 인가

박재현 교수
박재현 교수

 

논평 : 박재현 교수(동명대학교)

이 논문은 태고보우 선사가 보리달마로부터 연원하는 조사선풍의 계승자이고, 구산문의 통합을 지향하여 한국선의 면모를 일신하려고 시도했던 임제종풍의 전승자로서 면수와 사법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태고 보우가 한반도에서 완벽히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도 중국 조사로부터 다시 인가받는 과정을 거쳤던 반면에, 지눌은 철저히 국내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의 정당화를 중국으로부터 구하지 않았다. 굳이 두 인물을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보우의 행적이 특별히 높게 평가될 이유도 찾기 어렵다. 태고 보우는 그의 세납 46세 때 석옥청공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석옥을 만나 그의 가르침에 촉발되어 깨친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고려 땅에서 지어 가지고 간 《태고가(太古歌)》를 인정받은 것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면수(面授)와 사법(嗣法) 운운하기에는 좀 궁색해 보이지 않는가. 설사 태고 보우가 임제종의 대가로부터 배워 온 심법(心法)을 고려 땅에 전파하였다 하더라도 특이하게 새로운 것을 추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강조한 간화선은 고려 중기에 이미 지눌이 이미 도입했고 제자 혜심이 발전시켰던 것이었다.

원융사상 구현의 중요성, 스님들이 인식해야

총무원장 상진 스님이 종합토론 후 총평을 하고 있다.
총무원장 상진 스님이 종합토론 후 총평을 하고 있다.

 

총평 : 상진 스님(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장)

한국불교 종조가 태고보우 스님이라는 것은 90년대에 이미 확인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신미대사가 한글을 만들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든 것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연구와 조사를 통해 묻혀 있던 진실을 역사 앞에 드러내놓은 것이다. 단절된 한국불교의 맥을 살려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다. 이번에 한·중·일 불교대회에 온 중국 스님들이 석옥청공 스님 시집을 가져왔다. 보우 스님이 석옥청공에게서 인가를 받아온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런 세미나를 통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을 바로 잡아야 한다.

질책하는 말이 있어야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태고종 스님들이 원융살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교수님이 지적한대로 원융사상을 구현하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종도들이 알아야 한다. 이런 세미나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문제점을 밝혀 주는데 있다. 우리가 늘 아쉬운 점은 입은 많으나 손발이 없다는 것이다. 종단에서 받아들여서 앞으로 원융사상을 잘 구현해갈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각자 흩어져 있더라도 원융회통을 모색해가야 한다. 그것이 종조 태고보우 스님의 사상을 더욱 더 살려가는 길이다.

정리=최승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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