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을 믿고[信] 행하는 불제자(佛弟子)들은 오직 불법을 널리 전하는 포교가 대(代)를 이어주는 생명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뿐만 아니라 과거 역대조사님들의 한결같은 유훈(遺訓)을 보면 전법도생(傳法度生)은 반드시 빠뜨리지 않았다. 부처님 당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도 법을 펴는 모습이 그러하였다. 교조이신 석가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잠시도 쉬지 않고 49년 동안 많은 제자는 물론 바라문, 거사, 장자,, 국왕, 대신, 외도들에게 법을 설교하시어 제도하셨고, 석가 세존 앞에서는 어떠한 이류(異類)라도 설교를 들었고, 또 안 들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에게, 아귀(餓鬼)를 만나면 아귀에게 부처님 말씀을 듣게 하여 상대방 근기(根機)에 맞추어 법을 설하셨기 때문에 알아 들었다. 만약 아귀에게 나한들에 설하는 법을 법문을 했다면 법이 높아 알아 듣지 못했을 것이고, 반대로 나한을 만나서 아귀에게 할 법문을 했다면 법이 낮아 듣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포교의 제일 중요한 부분은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과 근기를 잘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제일관근두교(第一觀根逗敎)라 한다.

병이 난 사람에게는 의사가 되어야 하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바른 길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진정 피부로 느껴지는 포교활동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 포교사업에 모두가 눈을 뜨지 않으면 본래 불제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결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굳게 서맹(誓盟)하여 불문에 귀의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의무를 다하려면 모두가 일어나 포교에 전념해야 한다.

포교를 하지 않으면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며 중생을 제도하지 않고서 어찌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겠는가. 부처님의 은혜를 갚지 않으면 불제자의 도리가 아니다.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선도타인(先度他人)하는 보살행을 칭찬하시고,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이승(二乘)을 꾸짖으셨다. 불제자로서 교단내에서 할 일이 많지만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 우선해야 한다. 만약 자기 혼자서만 성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외면한다면 이승의 독각(獨覺)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불제자라면 자신이야 강경(講經)을 하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지주(持呪)를 하든 간에 중생제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한국불교는 일천칠백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종교다. 그럼에도 불과 백 년 남짓된 다른 종교에 비교되어 심지어는 교세의 비교분석을 키재기 한다니 그 자체가 남부끄러울 뿐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너나없는 불제자들이 포교흥업(布敎興業)에 너무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은 과거 몇 백년 동안 정치적 압박을 받아서 일반사회와 불교가 격리된 것도 하나의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근자에 와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가운데 우리 불제자는 무엇을 했는가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되돌아보면 현대사회는 글로벌화되어가고 있고,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에 맞춘 포교전략과 콘텐츠는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범종단 차원의 포교전략과 콘텐츠를 개발해 보급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과거 신라시대의 찬란했던 시절과 같이 돌아가려면 전법교화에 전 종단이 뜻을 모으로 의지를 결집해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선지식이라도 포교에는 인색하면서 자신의 명리(名利)만 찾아 행동한다면 참다운 불제자로서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눈 먼 이승들의 질타와 방해를 받으면서도 어린 유치원생부터 청장년은 물론 독거노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위한 복지시설과 유치원 등을 건립해 불철주야 열심히 포교에 전념하는 스님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이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불제자의 사표(師標)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에 보익(報益)을 주는 실천이 참다운 포교라 생각한다.

-태고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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