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⑧

惠能來衣此地 與諸官寮道俗 亦有累劫之因 教是
先性所傳 不是惠能自知 願聞先性教者 各須淨心聞了
願自除迷 如先代悟 「下是法」

혜능이 이 지역으로 와서 여러 관료, 도속인들과 함께하는 것은 여러 겁 동안의 인연의 결과이다. 선대 성품이 전해진 바가 가르침이 되는 것이지 혜능 자신이 안 것이 아니다. 선대 성품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이는 각기 맑은 마음을 깨끗이 하여 분명하게 들어라. 원컨대 스스로 미혹을 제거하여 선대와 같이 깨닫기를 바란다. 「이하의 법이다.」

 

혜능의 개인적인 알음알이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선대 성현들의 제자를 깨우치기 위한 마음 씀, 본래 성품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선대의 깨친 이들은 아상(ego)이 무너져 있기에 언행에 있어서 자신의 업이 개입되지 않는 무위법으로 살아간다. 법이란 본래 성품대로 발현되고 전해지는 것이다. 혜능의 가르침도 그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니 섣부른 속단을 내려놓고 진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임하라는 말이다. 무엇인가 믿기 힘든 가르침이 나타날 것이라는 징조를 예고한다.

惠能大師喚言 善知議 菩提般若之知 世人本自有之
卽緣心迷 不能自悟 須求大善知識 示道見性 善知識 愚人知人
佛性本亦無差別 只緣迷悟 迷即爲愚 悟即成智

혜능 대사가 외치듯 말했다. 선지식아! 보리의 지혜를 알 수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미혹한 연유로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대 선지식을 구하되 보여지는 도를 통해 성품을 봐야 한다. 선지식아! 어리석은 사람과 똑똑한 사람에게 있어서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다. 다만 미혹함과 깨침에서 연유할 뿐이다. 미혹하면 어리석어지고 깨달으면 지혜를 이룬다.

‘보리반야지지(菩提般若之知: 깨달음의 지혜를 안다.)’를 일반적으로 뒷부분(之知)의 번역을 생략하여 ‘깨달음의 지혜’라거나 ‘반야지혜’로 전체를 일반 명사화 취급한다. 개인적으로는 ‘~之知(지지)’의 의미를 살려주는 것이 혜능의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는 주장에 잘 부합된다. 우리에게 반야지혜가 본래부터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발견하거나 알 수 있는 힘이(능력)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사실이 핵심인 것이다. 물론 보리반야를 증득하고자 오랜 세월을 수행하며 밖으로만 선지식을 찾아 헤매던 구도자에게는 황당하고 허무한 말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여 선지식을 찾아가게 되더라도 선지식에게서 도를(깨달음) 받아내려는 의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단지 그 선지식을 통해 자기 내면의 선지식을 만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시도견성(示道見性), 미혹한 이는 반듯이 선지식을 찾아가야 할 것이며 그가 보여주는 도를 통해 성품을 봐야 한다.’는 의미다. ‘示道’는 누구에게서 보여지는 도이며 ‘見性’은 누구의 성품, 무슨 성품을 보는 것일까. 이 문장을 보통 ‘선지식을 찾아가서 도를 보아 견성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새기지만 수동적이다. 여기서 ‘시(示)’자는 일반적으로 피동적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선지식에게서 보여지는 것이 ‘도(道)’란 의미가 된다. 이 도는 선지식이 제자의 근기에 따라 드러나는 다양한 말과 행동들을 통해 자신을 돌이켜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화엄경에서 선재동자에게 보여진 53선지식들이 위선 없는 모습을 통해 깨쳐나가는 구도의 원리와 동일한 것이다. 즉 혜능의 선지식은 외부에서 찾는 선지식이 아닌 내부에 있는 진정한 무상(無相)의 선지식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밑받침해주는 것이 다음 문장이다.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고, 다만 미혹함과 깨침에서 연유할 뿐이다.’라는 말은 미혹함과 깨침의 주체가 ‘스스로’라는 말이다. 외부에 있는 존재가 내게 깨달음을 줄 수 없다. 단지 안내할 수 있는 것이고, 동기부여 하는 것뿐이다. 이런 혜능의 가르침은 구도자들에게는 큰 혼돈을 줄 것이다. ‘구도자’라는 말 자체가 도를 구하고 있는 이들을 말함인데 구하는 일을 멈추라면 큰 충격이고 마음은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그 구하는 마음을 방향만 선회하면 되는 일이기에 물리적으로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밖으로만 향해 있는 자신의 의식작용을 먼저 알아차림하여 스스로에게로 시선을 돌려놓는 일을 하면 된다. 그렇게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마음을 관하면 자신이 무엇에 붙들려있고 어떤 판단이 정견(正見)을 가리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초기경전의 말씀인 ‘자기를 섬으로 삼아라!’는 의미이다. 이런 회광반조의 행위가 있어야 스스로를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미혹하면 어리석어지고 깨달으면 지혜를 이룬다. (:迷即爲愚 悟即成智)’는 말에서 미혹이 별도로 있어서 자신의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만 향한 등불을 자신에게로 돌리면 미혹은 나에게서 사라지고 지혜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니 깨달음은 자신의 업장을 깨쳐나가는 일에 불과하다.

善知識 我此以門 以定惠爲本 弟一勿迷言惠定別
定惠體一不二 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時定在惠
卽定之時惠在定

선지식아, 나의 법문은 정(定) 혜(慧)로써 근본을 삼는다. 제일은 정혜로 분별되는 말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다. 정과 혜는 한 몸으로 둘이 될 수 없다. 즉 정은 혜(본체)의 몸이 되고 혜는 정의 쓰임(작용)이 된다. 곧 지혜가 나올 때 선정에 지혜가 있는 것이고, 즉 선정이 될 때 지혜가 선정에 존재하는 것이다.

혜능의 법문이 ‘정(定) 혜(慧)’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말은 정(定) 혜(慧)가 별도로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즉시 우리의 의식은 정(定)과 혜(慧)를 구분 짓고 그곳에 머무는 일을 먼저 한다. 혜능은 이와 같은 무의식적 분별작용을 알아차림하여 그런 이분법적 사량작용을 허용하지 않도록 경계심을 놓치지 말 것을 경각시킨다. 이것은 마음이 대상과 접촉하여 일으킨 명색(名色)1)에 머물러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일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 일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는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어 앞으로 전해지는 혜능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지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주로 하는 일은 외부에서 수신된 대상을 쉼 없이 사량분별하는 일을 본분으로 하기에 현실적으로 이런 경지를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마음이 대상을 분별하더라도 서로의 경계를 분명하게 대비시켜서 그 선명도로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의도를 최대한 배제시켜서 각각의 존재 자체를 독립되게 인지하는 힘을 키워내는 것으로써 대상에 붙들리는 미혹을 조금이나마 극복해 내는 방법을 쓸 수 있다. 그런 의식의 힘이 있으면 정(定)과 혜(慧)의 선후 관계와 상호 연관성에서 오는 혼돈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어 정(定)과 혜(慧)의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개념에서 자유로워 질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불교의 십이인연 가운데 하나. 개체적(個體的) 존재로서의 정신(개념)과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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