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처음 만나는 이에게 건네는 말이 인연이라면, 자신의 곁에 마지막까지 있어 준 사람에게 전하는 말은 운명이라고 한다. 좋은 인연(善緣)과 나쁜 인연(惡緣) 그리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는 인연(无緣)이 있다. 반면에 운명은 자신이 직접 만든 인연의 결과다. ‘운은 돌아온다’라는 뜻으로 반복된다는 의미다. 원인이 있으면 원인으로 인한 결과가 있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른다.

우리 현실에서 펼쳐진 무수한 삶의 편린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많다. 그럴수록 운명의 편린은 마음속에 그려 놓은 청사진을 꽃피우지 못하게 만든다. 붙잡고 있는 것이 짊어진 삶의 무게보다 더 무거워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다.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다시 끌어당기는 힘은 고무줄과도 같다. 역설적이지만 운명의 편린으로 활기 되찾은 성자들이 있다. 현자들에게 고난의 시기는 운명의 편린을 추가하는 계기가 된다.

일반인들에게 운명(運命)은 시련이다. 흔히 자신의 일에 실패하거나 잘 안 되었을 때 “그건 내 운명이야”라며 변명한다. 초인간적인 힘에 의해 이미 정해져 버린 처지라는 것을 자위하며 포기하기 일쑤다. 겨울이 오면서 추워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추위를 이겨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삶은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인의 조합이다. 그것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가진 용기와 실천에 달려 있다. 혹자들이 말하는 어설픈 운명론에 빠져 허우적댈 시간이 없다.

우리는 “운명을 개척하다”라는 말을 쓰지만, “숙명을 개척하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없다. 불안하고 불투명한 사회에서 높은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이들이 다시금 되새겨볼 만한 격언이다. 풀어낼 수 없는 숙제인 딜레마와도 같은 운명이지만 누구나 피할 수 있는 화살 같다. 그것은 바꿀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것은 분명 숙명(宿命)이다. 태어난 것까지는 숙명이지만, 그 후의 삶은 분명 바꿀 수 있는 운명이다. 지금, 나의 실패가 숙명적인 것은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까지만 숙명일 뿐이다. 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자서전에서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어서 피할 수 있지만,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어서 피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나의 운명은 얼마든지 바꾸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스스로 바꿈과 구조적 변화를 의미하는 운명과 달리 숙명은 자신과 상관없이 부여된 불변의 명(命)으로 정해진 시간이다. 이미 고정된 시간이므로 잘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변화의 구조적 모순과도 같이 숙명의 라이벌은 변하지 않을 영원한 숙적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지만, 운명의 라이벌은 때가 지나면 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보면 지혜로운 관리가 필수적이다.

운명에는 용기가 우선이고, 숙명은 선택에 달려 있다. 2014년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위험한 자요. 장군과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려가 숙명인 자들이지만, 그는 20살 남짓에 원나라를 버리고 조선을 선택한 자”라는 명대사처럼 삼봉 정도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숙명을 바꾸었다.

무엇을 선택하는가에는 자신의 의지가 담겨 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총동원해서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적 행위이다.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자신의 정보가 충분하였음을 나타내지만 나쁜 결과는 곧, 자신의 입력 정보가 부족하거나 판단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사례가 된다. 부족한 정보를 가진 이들은 때론 권력과 자본으로 결과를 뒤바꾸는 잘못된 관행도 종종 벌이고 있다.

인간사에 운명과 숙명이 있을지라도 자연계는 순리에 따른다. 사람들은 모두 결실의 계절이라 말하지만, 꽃과 풀들은 씨앗을 통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종족을 보존하고 영역을 넓힌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운명과 숙명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바위에 떨어진 씨앗은 바람과 비, 다람쥐의 행동에 따라서도 조건이 바뀔 수도 있다. 사람은 인연(因緣)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원인과 결과만이 존재하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아니라 조건과 환경에 의해 결과를 다르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인연법이 그것이다. 불자들이 운명과 숙명이 아니라 인연을 더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는 운명을 바꾸어 나가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로 새 인연을 만드는 노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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