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휴 스님의 ‘오동향로’

온갖 원(願) / 앉힌 자리 / 꿈을 태운 화중삼매(火中三昧) // 이제는 / 연지(燃指)로도 / 갈 수 없는 서역만리(西域萬里) // 향연(香煙)은 / 빈 성터에 남아서 / 꽃잎으로 피고 있다. // 살포시 / 유성(流星)을 앉혀 / 저 궁전(宮殿) 지등(紙燈) 밝히면 // 쉬었던 / 구름도 이젠 / 용이 되어 비천(飛天)하고 // 먹물 빛 / 차가운 가슴도 / 빛을 안아 사리(舍利)런가

정휴스님의 ‘오동향로(鳥銅香爐)’ 전문

 

오동향로의 빛깔은 검붉다. 구리의 빛깔에 세월의 더께가 더해진 까닭에 천년바위에 푸른 이끼가 낀 것처럼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느낌이 든다. 오동향로 앞에 서면 천 년 전의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오동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제 몸을 태우면서 한 오라기의 얇은 실 같은 연기를 만들고 이내 종적 없이 사라진다. 천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까닭에 오동향로는 ‘영겁(永劫)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오동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피어오르자마자 사라지는 까닭에 ‘찰나(刹那)의 시간’을 상징한다. 하여 오동향로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무상(無常)이다. 가없이 윤회하는 우주자연의 시간에 비하면 가뭇없이 소멸하는 인간의 시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시인이 오동향로의 향연(香煙)을 보고서 패망한 고도(古都)의 빈 성터에 피어나는 꽃을 떠올리는 것도 비록 인간의 삶은 유한할지라도 영원에 닿고자 하는 비원(悲願)만큼은 무한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향로는 제기(祭器)이고, 향로에 피어오르는 향연(香煙)은 산 자[遺族]가 죽은 자[亡者]를 그리워하면서 혼을 부르는 제의(祭儀)라는 사실이다. 시편에서 향로에 피어오르는 향연은 이승의 차안(此岸)에서 저승의 피안(彼岸)을 건너간 넋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소리이고, 이에 화답해 넋이 서역만리(西域萬里)를 다시 건너와 남겨진 이에게 잘 살고 있느냐고 인사를 건네는 소리이다.

설령 그 향로가 유서 깊은 고찰(古刹)에 놓인 오동향로이고, 향로에 향을 피우는 이가 고승대덕(高僧大德)이라고 할지라도 향로에 피어오르는 향연의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화중삼매(火中三昧)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타오르는 향연 속에 빨려 들어가서 모든 사념(邪念)이 사라지는 몰아지경(沒我之境)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오동향로에 피어오르는 향연(香煙)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르고 이에 죽은 자가 응답해 죽은 자를 만나러 오고, 그리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오랜 이별 끝에 만나서 벌이는 향연(饗宴)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동적인 이미지가 정적인 이미지로 환치되거나 역으로 정적인 이미지가 동적인 이미지로 환치되면서 찰나의 시간이 영겁의 시간으로 승화된다는 점이다.

가령, 4연에서 까마득한 시공간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유성(流星)’이라는 동적인 이미지가 ‘살포시 앉힌다’는 정적인 이미지로 환치되고, 이윽고, ‘천상에서 떨어진 찬란한 불빛’이 ‘궁전(宮殿) 지등(紙燈)’으로 승화되는 것이나, 5연에서 ‘쉬었던 구름’이라는 휴지(休止)의 이미지가 ‘비천(飛天)하는 용(龍)’이라는 역동(逆動)의 이미지로 환치되고, 이윽고, 6연에서 ‘먹물 빛 차가운 가슴’이라는 일시적인 비애(悲哀)의 이미지가 ‘빛을 안은 찰나(舍利)’라는 영구적인 희열(喜悅)의 이미지로 승화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런 상반된 이미지들의 합일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향연이 꽃잎이 피고 있고 있는 빈 성터로 승화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오동향로에 피어오르는 향연이 다름 아닌 치열한 구도 끝에 피어난 깨달음의 꽃잎이고, 그 깨달음의 꽃잎이 피어나는 자리는 다름 아닌 빈[空] 성터임을 어렵지 않게 깨닫기 때문이다.

이 시편의 저자인 정휴 스님은 1944년 경남 남해 출생으로 19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돼 등단했으며, 불교방송 상무, 불교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교 언론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정휴 스님은 수상집, 장편소설 등 다채로운 불교서적들을 발간했지만, 발표한 시편들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동향로(鳥銅香爐)’는 과작(寡作)의 시인이 남긴 수작 중 한 편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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