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

미당 서정주는 가장 겨레의 말을 잘 구사하고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기도 하지만, 불교교리를 운문에 가장 잘 용해한 시인이기도 하다.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시집 《신라초(新羅抄)》에 실린 〈꽃밭의 독백〉 전문이다. 《신라초》는 미당 서정주가 민족문화의 원형을 신라의 신화적 공간에서 찾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꽃밭의 독백〉의 부제는 ‘사소단장(娑蘇斷章)’, 즉, ‘사소의 짧은 이야기’다. 미당 서정주는 주석을 통해 “사소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소설화를 모티브로 한 〈꽃밭의 독백〉은 인간세계의 유한성을 구도정신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역력한 작품이다. 〈꽃밭의 독백〉의 화자는 사소인 동시에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에서 노래는 시일 것이다. 시인에게는 시를 쓰는 것이 그나마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일일 것이나, 아무리 절창의 시를 쓰더라도 한낱 인간계의 노래에 지나지 않기에 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멎어 버렸다”는 표현 역시 세속적 욕망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탐욕이 많은 까닭에 물질에 속박되어 어리석게 살아가는 중생의 세계인 욕계는 수직적으로는 하늘을 벗어날 수 없고, 수평적으로는 땅을 벗어날 수 없다. ‘구름’과 ‘바닷가’는 인간계의 경계를 일컫는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는 표현은 세속의 산해진미(山海珍味)에는 흥미를 잃었다는 의미이다. 나아가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는 인간의식의 육입(六入)에 대한 초극의지로도 해석된다.

그러던 중 시적 화자는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을 보게 된다. 꽃은 인간계 너머의 천상세계 내지는 인간의 욕망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화자는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꽃의 닫힌 문 앞에 서서 독백을 하는 것이다.

수면에 얼굴을 비춰본다는 표현에서는 자연스럽게 진각(眞覺) 혜심(慧心) 선사의 선시를 떠올리게 한다.

池邊獨自座 못가에 홀로 앉아   
地底偶逢僧 물 밑의 그대를 우연히 만나
默默笑相視 묵묵히 웃음으로 서로 바라볼 뿐
知君語不應 그대를 안다고 말하지 않네.

못가에 홀로 앉았다가 물비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묵묵히 웃는 진각 혜심 선사. 이는 주객(主客)이라는 양변을 여의고 불이(不二)의 경계에 들었음을 방증한다.

〈꽃밭의 독백〉의 시적 화자가 꽃의 닫힌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문 열어라”라고 애타게 소리치는 이유도 같으리라. 깨달음의 경계에 들고자 하는 원력일 것이다.

오죽하면 시적 화자가 벼락과 해일을 만나더라도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하겠는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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