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⑥

惠能答曰 我此踏確 八箇餘月 未至堂前 望上人引惠能
至南廓下 見此偈體拜 亦願誦取 結來生緣 願生佛地
童子引能至南廊下 能即禮拜此偈 爲不識字 請一人讀
惠能問已 即識大意 惠能亦作一偈 又請得一解書人
於西間壁上提着 呈自本心 不識本心 學法無益
識心見姓 卽吾大意

 

혜능이 말하였다. “내가 여기서 방아 찧은 지가 여덟 달이 지났는데 그 방 앞에 가본 적이 없소이다. 바라건대 그 게송을 보고 예배하도록 당신이 나를 남쪽 회랑에 데려다주겠소? 또한 그 게송을 외워 다음 생은 부처님 땅에 태어나는 인연을 짓고 싶소이다.” 동자가 혜능을 남쪽 회랑 밑으로 인도해 주었다. 혜능은 그 게송에 예배는 했으나 글자를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 읽어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는 즉시 그 대의를 알았다. 혜능도 역시 게 한 수를 지어 글을 이해하고 쓸 줄 아는 이에게 서쪽 벽 한 칸을 정해주고 거기에 붙여줄 것을 청했다. ‘자신의 본래 마음이 드러났는데 본심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마음의 성품을 아는 것이 나의 대의이다.’

혜능 선사가 취한 깨달음의 메타포를 일자무식을 통해 강렬하게 어필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비록 글을 모르더라도, 남의 말을 듣고 상대의 안목을 알 수 있으며 자신 또한 글을 알지 못하지만 부끄러움 없이 남의 재주를 빌려서라도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한 대장부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원문 마지막 구절은 아마도 신수를 향한 말일 것이다. 특히 밑줄 친 ‘오(吾)를 이본에서는 ‘깨달을 오(悟)’로 표기하여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아야 대의를 깨닫는다.’라는 다소 상식적인 해석을 하고 있어 그 의미에 큰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는 혜능의 ‘대의’에 대한 자신의 살림살이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깨친 이의 기백이 보인다. 신수가 게송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살림살이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함을 힐난하고 있다. 마음을 소리로 드러낸 것이 말이 되고 그 말을 기호(문자)로 기록하면 글이 된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마음은 필히 왜곡된다. 자신이 하는 말과 글 속에 자신도 모르게 담긴 본인의 의도나 업식(業識)을 안다면 그는 지혜로운 자다. 혜능이 신수의 게송을 들었을 때 이미 그의 근기를 다 꿰뚫어 알아 버렸음을 이 문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본래 마음이 드러났는데 본심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법을 많이 배운 이가 배움을 통해 깨쳐 지혜를 갖추었다면 자신이 어떤 경지에 있는지 스스로 알아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신수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의미다. 반면에 혜능은 스스로의 마음이 갖는 성품을 깨쳤기에 이것이야말로 대의(大意)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자기 마음의 살림살이를 밖으로 드러냄에 거리낌이 없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惠能偈曰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姓常靑浄 何虚有塵挨.
又偈曰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清淨 何處染塵埃.

혜능이 게송하기를.
보리1)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 역시 받침대가 없다.
불성은 항상 푸르게 맑으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겠는가.

보리 즉, 깨달음은 본래 완전하기에 생사(生死)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나무처럼 자라고 키워낼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성취라는 측면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범하는 흔한 착각이다. 나무를 키우는 마음은 매일이 노심초사다. 마음은 항상 그것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것은 선의의 집착심이라 하겠지만 집착이라는 물리적 현상에서는 동일한 상태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집착된 안목에서는 통찰이 일어나지 않는다. 선(禪)은 처음부터 대의를 품고 시작한다. 서서히 키워가자는 마음으로는 대오(大悟)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각각의 과정마다 형성되는 경계의 상(相)에 빠질 확률이 높다. 결국 법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거울이 진정으로 투명하고 맑다면 무엇으로 거울을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유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마음 작용의 실체를 직접경험하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이해한 것을 사실로 여기는 판단오류의 착각일 뿐이다. 이처럼 상식적인 일을 제대로 판단해 내지 못한 것은 무엇에 눈이 가려져 있기에 그러했는지 우리도 돌이켜볼 일이다.

또 게송하기를.
마음이 보리의 나무요 몸은 명경대로 삼는다.
맑은 거울 본래 깨끗하고 맑으니 어느 곳이 티끌로 더러워지겠는가.

신수는 몸이 보리(깨달음)의 나무라 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이것에 대해 혜능은 마음이 오히려 보리의 나무라고 반론한다. 깨달음엔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혜능은 이미 시비가 끊어진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보리, 즉 깨달음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크게 다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몸은 오감으로 분명하게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물질로서의 인식 대상이다. 그래서 신수는 깨달음도 일정한 상(相), 이미지로 설정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신수는 몸이 자라듯이 깨달음도 점진적으로 자라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와는 반대로 혜능은 몸과 마음에 대한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마음이 정말로 맑고 깨끗하여 투명하다면 무한한 허공처럼 그 경계가 없어야 한다. 즉 마음을 받쳐주거나 경계 지어줄 테두리가 없어야 진정한 맑은 거울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 경계를 지어놓은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신수는 12처 18계의 한계를 요달하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있음이다. 그렇다고 혜능의 주장은 모든 것이 본래 없는 것이어서 허무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근래에 자주 등장하는 전문 강사들의 무사선(無事禪)의 자기 합리화의 말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가르침이다. 불성은 본래 푸르고 맑기에 마음에 대(臺)가 있다면 이것 또한 티끌이 된다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상태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허물이나 티끌이 묻을 수 없어서 시시때때로 털어낼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수의 마지막 구절은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동감을 얻어낸다. 그러나 수행의 본질에서는 벗어나 있다. 자신의 안목은 모두 18경계에 이미 붙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등명(자귀의, 회광반조-메타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조 홍인도 이 사실을 이미 간파했기에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것인데 역시 신수는 스스로를 돌이키지 못했기에 게송을 다시 지어오지 못한 것이다. 혜능은 신수의 이런 소승적(상좌부) 불교의 수행방식의 한계를 꼬집은 것이며 나아가서 중국에 대승(大乘)불교가 전해 졌음에도 소승(小乘)화 돼가는 중국불교의 세태까지도 힐난한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범어 bodhi(:깨달음)를 보리(菩提)로 음사.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