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 ⑤

五祖曰 汝作此偈 見即來到 只到門前 尙未得入
凡夫於此偈修行 卽不墮落 作此見解 若覓無上菩提
即未可得 須入得門 見自本姓 汝且去一 兩日來思惟
更作一偈來呈吾 若入得門 見自本姓 當付汝衣法
秀上座去數日作不

 

오조가 말하기를 “네가 지은 게송은 견해가 뒤집히어 단지 문 앞까지는 도달하였으나 문 안으로는 미치지 못했다. 범부가 이 게송을 수행하면 악도에 떨어짐은 얻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를 짓는 것은 마치 무상보리를 찾더라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문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걸음 내디뎌 스스로의 본성을 보아 내일 양일까지 사유하여 다시 게송 하나를 지어 내게 보여라. 만일 스스로의 본성을 보아 문 안에 들어왔다면 마땅히 너에게 의법을 부촉할 것이다.” 했다. 신수 상좌는 돌아가서 수일 동안 짓지 못하였다.

신수는 오조의 ‘스스로의 본성을 보아[見自本姓]’라는 하명에 잠적해 버렸다. 신수에게는 ‘스스로의 본성’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보질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의식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지식정보를 분석하고 이해하여 정리하는 일에만 최적화 되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서 경험하는 일은 낯설고 어색한 일이기에 자신의 마음살림을 드러내는 일은 막막한 과제가 됐을 것이다. 자기의 본성(自本姓)’의 의미는 별도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흔히 불교를 이론적으로만 접하는 이들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존재의 유무(有無)를 따짐으로써 그 개념을 이해하는 습성이 강력하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와 같은 ‘유무(有無)’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분석하기 시작하면 진리의 깨침은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견해가 만들어질 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불법에 대한 견해는 견고한 상(相)을 만들어서 아집만 키운다. ‘스스로의 본성을 본다.[見自本姓]’는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 뇌과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메타인지1)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 작용은 무의식 차원에서 스스로 작동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그 순간순간마다 그 작동되는 자체를 인지하거나 지각하는 기능은 인위적으로 계발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이 기능을 발달시키기 위해 불교에서는 ‘알아차림’이라는 고유의 수행법이 있다. 이것은 ‘사념처’라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염처경》2)에서 말하고 있다. 중국의 불교도 이 기본적인 사항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단지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 선(禪)불교의 수행법이라고 판단된다.

有一童子 於確坊邊過 唱誦此偈 惠能一聞 知未
見性 即識大意 能問童子 適來誦者是何言偈
童子答能曰 你不知 大師言 生死事是大 欲傳於法
令門人等 各作一偈來呈 看悟大意 卽付衣
法 票爲六代祖 有一上座名神秀 忽於南廊下書無相
偈一首 五祖 令諸門人盡誦 悟此偈者 即見自性
依此修行 即得出離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며 이 게송을 읊었는데 혜능은 한 번 듣고, 대의에 대한 식견은 있을지언정 견성(見性:성품을 보다.)을 하지 못하였음을 알고 혜능은 동자에게 물었다. “마침 읊은 것은 누가 말한 게송인가?” 동자가 혜능에게 답하기를 “당신은 모르나보구려. 대사가 말하길 ‘생사는 일대사 일로써 의법을 전하고자 하니 문인들은 각기 게송 하나씩 지어서 내게 보이거라. 대의를 깨달았는지 살피어 의법을 전해서 6대 조사로 증표하리라.’하였소.” 상좌 하나가 있는데 이름이 신수이고 홀연히 남쪽 회랑 밑에 무상게(無相偈) 한 수를 썼다. 오조는 명하기를 ‘모든 문인들이 외워서 이 게송을 깨치게 되면 즉시 자기의 성품을 보고 수행하여 세속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혜능이 신수의 게송을 듣고 알아차린 것은 견성(見性)의 유무에 대한 부분이다. 그 게송의 주인공은 문자의 의미를 알았을지언정 그 바탕인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성품, 심리작용)는 깨치고 있지 못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견성(見性)’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필수적으로 ‘성불(成佛)’이 뒤따른다. 이 두 단어가 하나의 의미로 굳어진 듯하다. 즉 견성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견성’하면 부처가 된 줄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같은 경지나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단순히 뜻을 직역하자면 앞 자는 성품을 ‘보는’ 것이고 뒤는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그 발견된 ‘성품’이 본성(本性)이나 불성(佛性), 진아(眞我) 등으로 해석한다면 부처와 동일시해도 무관한 논리지만 그것은 힌두사상과 유사한 유아(有我)적 관점에서의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무아(無我), 공(空), 연기(緣起), 중도(中道)를 바탕으로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견해이다. 본서에서 이 ‘견성’에 대한 혜능 방식의 해석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앞으로 자주 등장하게 될 ‘견성’이라는 의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의미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신수는 알음알이를 통한 대의(大意)의 견해를 갖고 있을 뿐이다. 성품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오온의 작용, 즉 마음 작용의 특성을 요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수가 비록 분별식에 머문 수준이었더라도 교수사로서 최소한 중론의 유식(唯識)적 사고체계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번뇌를 ‘털고 말고’ 할 일이 없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미 중국에 삼론종(三論宗)3)이 성립되어 논서에 대한 담론도 성행했을 것이니 말이다. 오조 또한 그의 게송을 보고 근기를 간파했기에 다시 자신을 돌이켜 깨친 살림살이를 드러내 보이라고 다시 기회를 준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
2) 비구들이여, 이것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슬픔과 비탄을 초월하게 하기 위한, 육체적인 괴로움과 정신적인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진리의 길을 성취하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 즉, 사염처(四念處)이다. 『맛지마니까야1』,백도수.민속원,2002.
3) 삼론종(三論宗)은 구마라즙(鳩摩羅什: 344-413)이 한역한 「대품반야」·「소품반야」 등의 초기 대승경전과 용수(龍樹: c.150-c.250) 계통의 중관파 논서들 가운에,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三論)에 의거한 중국 불교의 논종(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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