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반갑지 않은 구설에 올라 망신 아닌 망신을 당하거나 낭패를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때때로 감정에 휘둘려 남에게 해가 되는 말과 행동을 일삼다 법정으로까지 끌고 가는 세상의 일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우바새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의 착한 일은 드러내주고 허물은 숨겨주라. 남의 부끄러운 점은 감추어주고 중요한 이야기는 발설하지 말라. 작은 은혜라도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며,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항상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기를 비판하는 자와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똑같이 괴로워 하거든 먼저 비판하는 자를 구하라.”

남의 허물을 감싸주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가 나의 허물을 들추어 말할 때 그것을 참는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의 허물을 감싸주고 겸허히 자신의 허물을 돌아볼 줄 아는 이를 일러 현자라 한다.

하지만 세속의 풍경은 남을 헐뜯고 약점을 들추어야 자신이 돋보이는 듯 상대를 공격하는데 익숙하다. 허물을 감싸라는 것은 진실 혹은 사실을 감추라는 얘기가 아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와 섭공이 토론하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섭공이 말한다. “우리 고을에 대쪽같이 곧은 사람이 있어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자식이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하였습니다.” 이 말에 공자는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다르오. 아비는 자식의 허물을 덮어주고, 자식은 아비의 잘못을 숨기지만 정직은 그 속에 있는 법이라오.” 아비의 죄를 폭로하는 행위는 정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칭찬할 일은 못 된다는 것이다. 아비는 자식의 죄를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의 죄를 숨기려는 것이 인간의 정리(情理)다. 세속의 아름다운 정리란 자기의 진정을 속이지 않는 데 있다.

단순히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 자기 성취의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오히려 나중에 그것은 해악이 되어 자신을 상하게 할 뿐이다. 따라서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허물보다 장점을 칭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상대의 장점에 대한 칭찬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발전적인 기틀을 다져주는 효과가 있다.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는 아동교육에 관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남긴 심리학자로서 그는 ‘하지 못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보라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프린트 숙제가 두 장 있다고 할 때 “아직 한 장밖에 안 했니?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조언이 아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들러는 “열심히 했구나. 벌써 한 장이나 했네. 이제 한 장만 더하면 되겠다”라고 말해주길 권한다. 이렇게 말해주면 아이는 한 장을 마친 자신의 행동이 대견 한 것임을 알게 되고 다음에 숙제를 성취해 내는 행동과정에 적극성을 띤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술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허물을 말하기보다 칭찬하는 말에 주력해 보길 바란다. 그럴 때 인간관계도 돈독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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