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
손택수 시인.

 

추석 무렵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김남주 시전집》, 창비, 2014)

*

과학기술의 발달은 이미지의 대중적 확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현대사회는 이미지의 범람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비자들은 똑같은 욕망, 똑같은 취향으로 평준화되어 의식 없는 집단을 형성한다. 이미지의 자동화와 습관화다. 이때의 이미지에 울림이 있을 리 없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래서 반향과 울림을 구별했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반향은 일방향적이고, 울림은 쌍방향적이다. 존재의 심화와 존재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시의 울림을 어렵게 만드는 반향으로서의 이미지가 가진 특징은 무엇인가. 바슐라르는 자신이 습득한 문화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콤플렉스를 언급했다. 상상력의 주체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외적 관습 요인들에 지배받는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선택한 이미지, 말하자면 일종의 문화관습이 내면화될 때 예술 주체들의 울림이 상투화된다는 것이다.

가령, 백조의 이미지를 자신의 영혼 속에서 역동적으로 작동시켜 벌거벗은 여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습득한 신화 속 제우스와 레다의 이야기에 연결되어 복사된다. 그래서 화가 세잔은 사과 하나를 그리기 위해 먼저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과 엄청난 전투를 벌여야 했노라고 고백했다.

수많은 달에 관한 시가 있으나 추석이 가까워져 오면 펼쳐보는 이 시는 문화 관습에 젖어 있는 여느 달과 다른 유머가 돋보인다. 엄혹한 시절 혁명가로서 오랜 옥고를 치른 시인이 달 속으로 귀환함으로써 얻은 동심과의 유대는 치열한 그의 시편들로선 매우 낯설다 할 웃음을 선물하고 있다. 제 딴엔 자못 심각하게 묻는 네 살짜리 사내아이 앞에서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는 초승달의 해학이 정겹다. 저 밭에서 나온 고추에 된장을 찍어 한 그릇 고봉밥처럼 떠오른 보름달을 따그락따그락 수저 부딪는 소리를 내며 퍼먹고 싶지 않은가. 순백의 환한 거름을 뿌린 들판 위로 달이 둥글어간다. 손을 잡고 달 속으로 귀성하는 아이와 아버지의 모습이 아련하다.

달은 차고 기우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기에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해의 눈부심 대신 은은함을 선택한 자의 여유이다. 동요 속 ‘달 달 무슨 달?’이라는 질문으로부터 쟁반도 오고 낮도 오고 거울도 오고 미처 만나지 못한 미지의 형상들과 교유관계를 쌓게 된다. 말하자면 달은 아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추석 풍속도가 많이 바뀌었으니 새로운 달이 뜰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모천의 수초 냄새를 잊지 못하는 연어처럼 우리의 그리움에는 달빛의 비늘이 묻어 있을 것이다. 농경문화의 관습과 관계없이 그리하여 우리는 달에게로 귀성한다.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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