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
손택수 시인.

 

두부

유병록

아무래도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듯한 살갗 안쪽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으로, 이미 견고해진 몸을 붙잡고 흔들던 손으로

두부를 만진다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보는 것이다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두부를 오래 만지면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곧 떠날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

이것은 지독한 감각, 다시 위독의 시간

나는 만지고 있다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 2014)

*

두부는 삶과 죽음의 명상가다. 시인에 따르자면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하면서 환생하는 시간의 여행자다. 들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보자. 두부는 돌과 돌 사이에서 온몸이 으깨지는 지옥을 통과하였고, 초강대왕이 지배하는 화탕지옥 같은 가마솥 시절 또한 지나왔다. 각을 잡기 위해 칼맛까지 보았으니 무슨 의지라는 것이 있을까만 분골쇄신 두부는 마침내 죽음의 고통을 생생한 생두부로 전환한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만나기 위해 명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의 현신이라고 할 수 없을까. 사라진 시간을 ‘순간의 촉감’으로 탄주하는 오르페우스의 리라는 이 시에선 매우 단순한 발상으로부터 온다. 관습적으로 쓰던 합성명사 ‘두부살’의 연결을 시침 뚝 떼고 분리시키자 자동화되어 있던 두부에 대한 인식이 멎고 두부와 살 사이에 낯선 명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살은 인간의 유한성을 지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온기를 잃고 조금씩 식어가는 운명의 시간과 겹쳐진다. 이미 식어버린 누군가의 숨결을 붙들고자 하는 안타까움은 전해지지 않는 온기 앞에서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부의 애도는 일상 속에서 잊고 살기 마련인 절박한 시간을 살아가게 한다. 비록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의 한계를 부정할 수 없으나 “두부를 오래 만지면/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곧 떠날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을 되살려냄으로써 반복할 수 없는 소멸의 순간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감각적 환생의 경험은 위독의 시간을 지키는 화자의 체온이 식은 두부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시 위독의 시간’ 앞에 정좌하여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는 것은 애도와 시가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개인적으로 참척의 고통을 겪은 시인의「두부」가 ‘지금은 없는’ 영혼들을 부르는 초혼례의 음식만 같다.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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