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②

금강경 뜻 알고 깨달았을까?

設此壇經 能大師言 善知識 淨心念摩訶般若波羅蜜
法. 大師不語 自心淨神 良久乃言 善知識 淨聽.
惠能慈父 本官范陽 左降遷流嶺南 新州百姓.

 

이 단경의 설함은, 혜능대사께서 말하길 ‘선지식아! 마음을 맑히어 마하반야바라밀법을 념하라.’ 대사는 잠시 말하지 않고 마음이 스스로 정신을 맑게 하며 침묵하고 마침내 말하였다. ‘선지식아! 맑혀 들어라! 혜능의 아버지는 본관이1) 범양이다. 영남지방으로 좌천되어 신주 백성이 되었다.’

여기서 금강경의 ‘부좌이좌(敷座而坐)’의 대목을 떠오르게 한다. 구마라집본에서는 이와 같이 간단하게 한역했지만 범본에는2) 가부좌를 결한 후, 곧게 몸을 세우고 전면에 알아차림을 확립하고(삼빠자나-sampajāna: 분명한 앎)와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혜능 대사도 부처님처럼 선정에 들지만 초기불교의 형태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피하고 중국의 수행문화에 맞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惠能幼小 父小早亡 老母孤遺 移來南海 艱辛貧乏
於市賣柴 忽有一客買柴 遂領惠能 至於官店 客
將柴去 惠能得錢 却向門前 忽見一客讀金剛經
惠能一聞 心名(明)便悟.

혜능이 유년 시절에 일찍 부친을 여의었고 노모와 함께 남해로 내려가 빈궁하게 살았다. 저잣거리에 땔감을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문득 땔감을 살 사람이 있어 곧장 혜능을 데리고 관점에 이르러 손님은 땔감을 들고 갔고 혜능은 돈을 챙겨 문 앞을 향해 가는데 어떤 객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보았다. 혜능은 한번 듣고 그 경이 마음을 지칭하는 것임을 즉시 깨쳤다.

우리는 자기가 과거에 경험한 것들에 견고히 붙들려 있다. 그래서 같은 대상에서 새로운 면이나 의미를 감지해 내지 못한다. 마지막 문장인 ‘심명변오[心名(→明)便悟]’를 ‘마음이 밝아져(:明) 깨달아서’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되면 혜능이 일자무식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전제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더욱이 후대 본에서는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낸다.’라는 구절을 듣고 깨쳤다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는 그 신빙성을 더욱 떨어지게 만드는 것인데 우리는 그와 반대로 인식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문은 뜻글자라서 글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그 문자가 갖는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리글자이지만 유구한 역사를 언어나 문자에 축적해온 한글과는 다르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말들을 듣는 즉시 대부분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경우와는 다른 형태로 한문은 형성돼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금강경은 문장들이 난해해서 불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육조단경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습득한 정보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성을 부여하는 비논리적인 사고적 오류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네 안목은 자신이 경험한 정보에 견고히 고착되어있어 그 업식을 통해 보는 것이 당연하다. 여실지견(如實知見)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의 이와 같은 문제 제기를 통해 자신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어떤 것이 ‘정확한 번역인가!’의 평가는 학자들의 몫으로 놔두자.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접하는 대상을 통해 오온(五蘊)의 실체를 관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 실질적인 마음 수행이다. 본서는 이와 같은 취지로 전개된다. 그래서 본문의 ‘심명변오[心3)名(明)便悟.]’를 ‘금강경의 의미는 잘 몰라도 마음을 지칭하는, 또는 마음에 관한 가르침이로구나!’의 의미로 해석하면 우연히 혜능의 귀에 들린 금강경의 한 구절이 단순히 지식의 산물인 알음알이의 경계에서 지각된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본성 차원과 계합되어 일어난 발심의 동기로 표현되는 것이 후대의 학인들이 이 경을 접할 때 단지 모양이나 소리를 쫓아 깨닫고자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4) 깨트려버리게(Vajracchedikā-번개로 단숨에 부숴버림) 하려는 육조단경의 본래 취지에 더 가까울 것이다.

乃問客日… 중략 …, 禮拜五租弘忍和尙

그리고 그 손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기에 그 경을 지니고 있는 것이요?’ 손님이 답하길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묘산에서 오조 홍인 화상을 예배했었소이다. 지금 그곳엔 문인 천여 명이 있소. 나는 그곳에서 대사가 도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하나만으로 즉시 성품을 보아서 곧바로 부처 이룸을 요달 할 수 있다고 권함을 들었소.’ 혜능은 이 말을 듣고 숙업의 인연이라 여기고 곧 어머니께 하직하고 황매 빙모산으로가서 오조 홍인 화상을 배례하였다.

법을 배우는 것과 법을 일으키는 것.

弘忍和尙問惠能日 汝何方人 來此山 禮拜吾 汝今
向吾邊 復求何物 惠能答日
弟子是領南人 新州百格姓 今故遠來禮拜
和尚 不求餘物 唯求佛法作

홍인 화상이 혜능에게 물어 말하길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이기에 이 산까지 와서 내게 절을 하느냐? 너는 지금 나의 껍데기를 바라보며 또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혜능이 답하였다. ‘제자는 영남 사람이고 신주 백성입니다. 이렇게 멀리서 와 예배드립니다. 화상께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라 오직 부처님 법 일으킴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오조 홍인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선어록의 주인공들은 스승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의 법기(法器)를 과감하게 드러낸다. 거의 법거량에 가까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위 대화에서는 혜능의 경지가 그 기백에서는 홍인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의 밑줄 친 ‘~불법작(佛法作)’에서 일반적으로는 ‘작(作)’자를 앞 자인 ‘불법(佛法)’과 분리하여 혜능이 예배를 마친 후 일어나는 동작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앞 자에 붙여서 ‘불법을 일으키다, 짓다.’로 해석하게 되면 혜능이 불법을 이해하는 폭이 오조 홍인 대사를 넘게 된다. 이것을 간파했다면 아마도 홍인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작(作)’자의 이런 해석의 근거는 다음 문장에서 홍인이 답하는 ‘작(作)’자의 쓰임을 보면 나만의 무리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의례 용어 중에 ‘법주(法主)’나 ‘작법(作法)’이란 말이 있다. 염불을 하는 스님의 경지가 법을 지어내는 법의 주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물론 그런 경지의 스님이 몇 분이나 있겠는가!는 차치하고)

보통 ‘~ 오직 불법을 구할 뿐입니다. 하며 일어섰다.’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구할 만한 일정한 불법을 설정해버리는 심리 현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하지만 ‘불법을 일으키다.’로 해석하면 불법이 일정한 상(이미지, 개념, 명칭화)으로 되는5) 심리현상을 상당히 방지할 수 있게 된다. 즉 불법에 생명을 넣어서 살아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6) ‘불법을 불법이라 하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고 이름이 불법이라’는 ‘즉비~,시명’의 가르침을 실참수행의 단계로 끌어주는 의도로 보인다.

-한국불교신문 2022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현 중국의 하북성 북부 지역.
 2)각묵, 『금강경 역해』 p35-36, 「불광출판사,1991.9.21」
 3)이름하다, 지칭하다(指稱--), 글자, 문자(文字), 외관(外觀), 외형(外形).
 4) 금강경(金剛經)-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5)  1.산자나띠(sañjānāti):대상을 자신의 업식을 투영해서 보는 인식작용, 중생의 안목
    2.아비자나띠(abhijānāti):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인식작용, 성인의 안목
 6)금강경 제8분: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제18분: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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