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2015, 문학판)

손택수 시인.
손택수 시인.

시낭송 청을 받는 일이 가끔 있다. 대개는 넌지시 물리치고 마는데 분위기가 그로 하여 어색해질 기미가 보이면 못 이긴 척하고 정현종의 「섬」을 낭송한다. 두 줄짜리 시를 낭송하겠다고 하면 실망스러워하는 눈빛들이 역력하다. 성의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이렇게 얘기한다. 이 시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긴 시인지도 모른다고….

두 줄짜리가 가장 긴 시라니? 비로소 호기심이 동하는 표정들이다. 잠자코 어쩌나 보자는 듯 내 일거수일투족에 주목을 한다. 뭔가 묘기라도 기대하는 눈빛들이다. 그러나 내 낭송의 비법은 특별한 것이 없다. 나는 행과 행 사이에 침묵을 모셔오기로 한다. 첫 행을 들려준 뒤 다음 행으로 옮겨 가기 전 중간 마디에 행과 행을 읽는 시간 단위보다 더 긴 침묵을 삽입하는 것이다. 그 침묵이 몇 초가 될 수도 있고, 십여 초를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고, 길게는 일 분이 될 수도 있다. 행과 행 사이의 침묵은 물리적 시간보다 훨씬 긴 심리적 시간으로 옮겨가서 일상에선 경험하기 힘든 매우 낯선 순간 속에 놓여 있게 한다.

어떤 이들은 그 잠시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채 몸을 들썩이는가 하면, 어서 남은 한 행을 서둘러 마무리 지어주길 바라는 성마른 눈빛을 보내오기도 한다. 두 번째 행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낮은 목소리로 남은 행을 마저 들려주는 이들도 있다. 낯선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 그리고 그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청중들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로운 모습들을 나는 짐짓 모른 척하고 공기 중을 향해 마치 소리의 선이라도 긋듯이 기다리던 한 행을 천천히 놓아준다. 적어도 시에서만이라도 쓰여진 언어만이 아니라 언어 너머를 향해 열려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이때 청중을 둘러싼 공간은 하나의 공명통으로 바뀐다. 누군가는 그 소리의 파문을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파문 지게 할 것이다.

소리로서의 시뿐만 아니라 시를 경험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침묵을 향해 있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시 감상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된 말이 지시하는 대상에만 묶일 땐 지시하는 대상 너머를 볼 수가 없다. 대상 너머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사전 속의 섬은 고향도 되고, 꿈도 되고, 관계도 되고, 여백도 된다. 미처 살아보지 못한 삶과 이미 왔으나 발견하지 못한 생의 비의를 향해 열린 기호가 된다. 사전 밖으로 나온 기호의 무궁무진한 확장은 저마다의 삶과 리듬을 긍정케 한다.

언젠가 본 영화 〈위대한 침묵〉은 대사 한 마디 없이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3시간 런닝 타임이 결코 지루하지 않게 생동하는 자연을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서 먼지 한 점 떨어지는 소리,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소리, 꽃망울이 기지개를 켜며 공기를 밀어 올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물활하는 세계의 기쁨을 향해 퇴화된 감각들이 열어젖혀질 때 침묵은 단순한 소극적 말 없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능동적 말이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언어가 점점 더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해가는 것은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존재 개개의 언어를 듣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폭력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듣는 능력은 들리는 소리에만 국한하지 않고 가청권 바깥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행위를 뜻한다. 침묵은 세상 모든 사물들을 들어 올리는 경청의 자세이기도 하다.

내 바람이 잘 전달되었는지 자신할 수 없다. 긴 숨을 토하듯 참고 있던 남은 한 행을 낭송한 뒤의 여운을 사는 건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내가 두 줄짜리 장시를 애송하게 된 이유이다.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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