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스님의 영산재 장엄미학

② ‘영산재’의 발전 과정과 기본 구성

북 치고, 범패 부르고, 요발 두드리며기록 있어

진언권공명발과 요잡 존재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

18세기 간행 범음집’, 전교(傳敎)의 대표적인 의식집

봉원사 영산재 1일 권공으로매년 66일 시연회

 
최근의 봉원사 영산재 중 식당작법.
최근의 봉원사 영산재 중 식당작법.

 

범패와 작법에 관한 문헌으로는 『삼국유사』, 『고려사』, 『진언권공』, 『운수단가가』, 『신간책보범음집』, 『범음집』, 『범음종보』, 『작법구감』, 『동국세시기』, 『동음집』, 『석문의범』등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가 있다. 『삼국유사』에 삼국시대 불교무용에 관한 기록은 찾기 어렵고 다만 범패의 기록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권5 「월명사도솔가조」에 의하면 월명사가 “향가만 알 뿐 성범(聲梵), 즉 범패를 알지 못한다”하였는데, 이때가 경덕왕 19년(760년)이다. 따라서 진감국사(774~850) 이전에 이미 범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적산원강경의식」에도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그 곡조가 아주 신라풍이었고 당풍을 닮지 않았다”라는 것으로, 적산원에서 불린 범패가 신라의 본토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신라에 이미 범패가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을 치고, 범패를 부르고, 요발을 두드리며 서너 명이 같은 목소리로 범패를 하였다”는 기록은 신라에서 이미 바라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왕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교로서 정해졌고, 또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불교는 국가로부터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고, 팔관회, 연등회, 백고좌도량 등이 불교적 요소를 융합한 국가적 행사로서 매년 거행되었으며, 대규모의 도량을 세웠다는 기록을 보면, 범패와 작법도 아주 성행했을 것으로 진단된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의식불교와 더불어 범패가 전승되었으나 조선중기에는 위정자들의 배불정책으로 불교의 중요한 지원세력인 사대부층에서 사라지고 불교의식은 일반 대중 속으로 밀려나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 4년(1422)부터 범패와 작법이 활발하게 행해졌다는 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진언권공』은 연산군 2년(1496) 인수대비가 학조대사에게 명하여 교정, 번역하도록 하여 간행한 목활자본으로, 현존하는 의식집이다. 이는 불교무용과 관련되는 명발과 요잡이 존재하였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청허휴정의 『운수단가가』(1607)에 ‘영산재’의 구성이 수록되어 있고, 『신간산보범음집』(1713)은 범패승의 계보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은 지환(智還)이 소례, 대례, 예수, 지반 등 다섯 가지를 절충하여 산보(刪補)한 것으로 조선 경종 1년(1721년) 중흥사에서 개간한 것과 영조 15년(1739년) 곡성 도림사에서 개간한 것이 있다. 『범음종보』는 영조24년(1748년) 대휘화상이 저술한 것으로, 이를 통해 국융·응준·혜운·천휘·연청·상환·설호·운계당법민·혜감·순영 등 범패승의 상세한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작법귀감』은 조선 순조 26년(1826년) 백파긍선이 여러 가지 의식문을 참고하여 편찬한 우리나라 불교의식집 가운데 가장 정밀한 것이다. 『동국세시기』는 조선 헌종 15년(1849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기에는 법고춤과 바라춤, 그리고 나비춤의 기록이 있어 조선 중기에 작법이 확실하게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음집』은 노랫말을 쓰고 그 옆이나 밑에 작은 글자로 이 선율이 다른 곡의 어느 부분과 같은 선율인지를 표기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으로“『박운월소장동음집』, 『옥천유교동음집』, 『김운공소장동음집』, 『장벽응소장동음집』 등이 있다. 특히 안진호 스님의 『석문의범』(1935)은 현재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다.

1960년대 봉원사 영산재 중 식당작법.
1960년대 봉원사 영산재 중 식당작법.

 

이상에서 불교의식집을 살펴보았듯이, 작법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있는 문헌은 『진언권공』(1496)이다. 여기에는 ‘요잡’과 ‘명발’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작법무의 역사는 500년 이상 전승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진언권공』 이전의 『삼국유사』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내용을 주목할 때, 범패와 작법은 적어도 1200년 이상 전승되어 온 것으로 진단된다.”

그런데 오늘날 전해지는 의식집은 조선 숙종(1675~1720) 때 의식집정비의 결과물로, 이는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가 빈번하고 전란(戰亂)이 겹쳐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해 있던 16~17세기 일반대중에게 신앙의례를 통한 사회적 위로를 적극 전개하였고 의식음악으로서의 범패는 일반대중에게 환희심과 위로를 주어 불교대중화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18세기에 간행된 『범음집』이 전교(傳敎)의 대표적인 의식집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몇 번에 걸쳐 증보판이 나오고 이어 19세기의 『작법귀감』, 20세기의 『석문의범』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편성된 불교의식집에서 작법무는 불교의식무용으로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중 불교로 변모, 전승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불교예술은 활력을 찾게 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불교가 억불정책에 의해 유교에 밀려 겉으로는 지배계층으로부터 외면을 받으면서 서민과 부녀자들 중심의 불교로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승려들은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염불 계(契)를 장려하고 염불을 널리 유행시키고 재의식에 예술적 형식을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이러한 재의식이 오히려 불교의 정법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고 하여 사찰령이 발표되고 그 취지에 따라 각 본말사법이 제정되어 범패와 작법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범패와 작법이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영산재’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됨은 물론, 2009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되어 우리 문화유산의 세계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영산재의 기본 구성을 살펴보면, 옛부터 모든 의식을 갖추어 법답게 거행하는 ‘영산재’를 ‘삼일영산(三日靈山)’이라 이름하여 왔다. 이는 단순히 영산재만을 거행하는데 3일이 걸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간 의식인 영산작법과 야간 의식 가운데 선택된 재의식[수륙,예수,각배]을 거행하는데 3일이 소요된다는 말이며, 좀 더 명확한 명칭을 붙인다면, ‘영산수륙재’ 혹은 ‘영산예수재’ 혹은 ‘영산각배재’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법회의 의미에 맞게 ‘영산재’ ‘수륙재’ ‘예수재’ ‘각배재’ 등으로 불리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삼일영산을 구성하는 있는 기능은 전승이 어려운 무형문화인 까닭에 삼일영산재(三日靈山齋)는 이미 옛 법이 되었고, 과거에 거행된 내용 가운데 자세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해방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영산재 전승자이셨던 고 박송암(朴松巖)스님(1973년 지정) 증언에 의한 절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날에는 시련, 대령, 관욕을 실시하고, 저녁에 다음 날 아침예불을 미리 올린다. 둘째 날에는 조전점안,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 중간까지 마친다. 식당작법 다음날 예불 봉행을 한다. 셋째 날에는 영산 중간부터, 운수상단, 중단(소청중위), 신중퇴공, 관음시식/전시식, 소대봉송, 회향설법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칠 때 3일 ‘영산재’라고 한다. 첫째와 둘째 날 저녁에 별공소로부터 종두가 7첩 반상 또는 9첩 반상에 음식을 장만하여 식지로 덮은 후 그것을 어깨에 멘 후 영단까지 이운하는 의식으로, 먼저 삼현육각이 앞장을 선 후 그 뒤 종두가 유주무주 영가들을 위한 영반상을 영단에 가져다”놓는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 절차는 근래에 들어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범음산보집』의 ‘상단시련론’에 의거해 거행되는 법의식의 종류는 ①오단권공(황혼이전), ②상단시련(초경), ③중단시련(이경), ④하단시련(삼경), ⑤권공 ⑥시식 등이다. 이들 의식의 거행 순서를 날짜별로 정리하면, 오단권공, 상단시련, 중단시련, 하단시련은 첫째 날 저녁부터 시작하여 자시에 마치고, 상단과 중단 권공은 둘째 날 낮과 밤에 각각 시행하며, 시식과 배송은 셋째 날 계양성이 뜨기 전까지 거행해 끝낸다. 이처럼 ‘영산재’에는 3일간 지속되는 복잡한 절차 의식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 ‘3일 영산재’가 곧잘 거행되었으나 오늘날 ‘3일 영산재’를 실시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시간과 재정상의 어려움도 있지만 사실상 3일간 영산을 인도할 어장(魚丈)스님이 몇 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원사에서는 과거 3일 영산을 근래에는 1일 권공으로 하여, 매년 6월 6일에 ‘영산재’ 시연회를 통해 그 맥을 잇고 있다.

정수 스님

불교문예학 박사. 국가 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이수자.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 교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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