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영산재의 연원

대중과 망자 함께 부처님 말씀 듣고 깨달아 이고득락
범패와 영혼천도 등의 불교의례, 신라시대부터 유래
홍윤식, “의식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부터 존재”
조자건설서 연유, “범패·무용을 하는 스님을 ‘어산’으로”

영산재 대중 스님들의 천수바라.
영산재 대중 스님들의 천수바라.

 

불교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영산재’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영산재 보존회 사이트에는 ‘지금으로부터 불기 약 2600년 전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 중생이 모인 가운데 《법화경》을 설(說)하실 때의 그 모습을 재현화한 불교의식’으로 언급되어 있다. 영취산은 중인도 마가다왕국 왕사성 근처에 있는 기사굴산(Gijjha-kūta)을 번역한 것이다. 영산은 영취산이라는 산에 신선[靈]과 독수리[鷲]]가 많이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고, 또한 산의 형세가 독수리의 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했기 때문에 당시의 법회를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한다.

따라서 《법화경》을 염송하는 까닭이 현세의 이익을 위한 것이든, 망자의 극락왕생 기원에 목적이 있든 간에, ‘영산재’에서 《법화경》은 단연코 빼놓을 수 없는 경전이다. 다시 말해, ‘영산재’를 수미일관하는 사상은 《법화경》의 수명무량(壽命無量)과 불신상주(佛身常住) 사상이다. 그렇다면 ‘영산재’는 법화사상을 핵심으로 꽃피운 문화예술의 결정체이며, 면면히 전승,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연구자의 판단이다.

《법화경》은 회삼귀일(會三歸一)과 구원성불(久遠成佛)을 핵심사상으로 한다. 특히 구원성불 사상은 부처님의 수명무량(壽命無量), 불신상주(佛身常主), 교화무량(敎化無量), 자비무량(慈悲無量), 그리고 구제무량(救濟無量) 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법화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영산재’는 부처님[佛]과 법화경[法], 그리고 회중[僧]을 소례(所禮)로 하여 예배·찬탄·공양함으로써 일체 함령(含靈)이 진리의 바다에 들도록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영산재’는 불. 법. 승 삼보(三寶)에 공양을 올리는 의식으로서, ‘영산재’ 의식에 있어 공양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만 공양을 매개로 하여 설판재자와 동참한 대중 모두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불법과 선연을 맺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영산재’는 시공을 초월하여 《법화경》을 설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운집한 영산회상의 모든 대중과 망자가 함께 부처님의 참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불교의식으로, 여기에는 불덕 찬탄과 소통의 장엄한 미학이 내재되어 있다 할 수 있다.

봉원사 영산재 포스터.
봉원사 영산재 포스터.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를 지닌 ‘영산재’의 연원은 어떠한가. 영산재의 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진단해 볼 수 있다. 주지하듯, 기원 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기원 후 1세기 무렵 중국에 유입되었다. 그리고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처음으로 불교가 한국에 전해지고, 신라에서는 527년(법흥왕 14년)에 불교가 처음으로 공인되었다. 불교의 이러한 전래과정에서 불교음악과 불교무용도 동시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 불교무용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범패의 기록만이 《삼국유사》에서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영산재’ 구성의 기본 요소인 범패는 《삼국유사》 혹은 쌍계사 진감국사(774-850)의 대공탑비문을 통해서 신라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산재’의 중요한 의미가 내재된 영혼천도 등의 불교의례도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있었음을 《삼국유사》의 ‘월명사조’나 《조선금석총람》, 《자각대사입당구법순례기》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의식집과 이에 관한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만 ‘영산재’가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전거가 될 만한 확실한 내용은 없다. 가령, 《범음산보집》의 ‘觀夫諸方靈山進供作法之事 自有古例’을 비롯하여 《진언권공》 작법절차의 법화법석 제반문 청문에 영산법석의 예문이 등장하고 있어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성립 연대는 당연히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앞서 지적한 의식문 구성의 여러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시기와 인물을 찾아 유추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홍윤식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영산재’가 의식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영산재가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영산재를 구성함에 있어 기본 요건이 되는 범패와 영산재의 목적이 되는 영혼천도 등의 불교의례가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으므로 비록 오늘에 전하는 영산재의 구성내용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연원이 될 만한 것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에 전하는 영산재의 내용구성은 조선 중기에 증보 편찬된 범음집 등에 나타나 있고 범음집의 의식절차의 부분적인 요소가 고려 시대에도 보이므로 의식불교가 가장 성행하였던 고려 시대부터 있어 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영산재의 내용 구성은 의식불교가 가장 널리 성행했던 고려시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심상현(만춘 스님)은 소동파(1036-1101) 혹은 그의 妹氏의 작으로, 그리고 고려 초기의 대각 국사 의천의 작으로 보며, 또한 수륙재의 미비점을 보완하고자 한 것이 영산재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이성운 교수는 그간 영산재의 성립에 대하여 법화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망인천도의식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고려시대 백련사 보현도량에서 시원적인 형태가 보이고, 여말선초의 법화법석으로 전개되다가 세종 2년 기신재와 추천재를 수륙재로 합설하라는 명으로 인해 영산회가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 연구자들의 견해와 수륙재가 한국에 전해져 최초로 설행된 것이 고려 태조 23년(940)임을 고려하면, ‘영산재’가 고려시대에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 연구자의 견해이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범패 및 불교 작법무에 대한 기록으로는 의식무의 역사와 유래는 입을 통해 전해오는 구전전설과 불교의식과 문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산재’의 구전전설로는 영산회상설, 조자건설, 백제인 미마지설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영산회상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 설법 당시 아름다운 색의 채화를 내릴 때 마하가섭존자가 알아차리고 미소 지으며 춤을 춘 것을 승려들이 모방했다는 설이다. 둘째, 조자건설은 중국의 범패 및 무용에 관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나라 무제(武帝)의 넷째 아들 조자건[조식]이 하루는 ‘천태산(천태산을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에 오르자 범천에서 신이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에 맞추어 고기떼가 춤을 추자 그 소리를 모방하여 범패를 만들고, 나아가 고기떼가 유영(遊泳)하는 모양을 본떠 승무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여기서 연유하여 범패와 무용을 하는 스님들을 지칭하여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 셋째, 백제인 미마지설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 특히 중국과 빈번한 문화적 교류를 하였던 때의 이야기이다. 백제인 미마지가 6세기 초 무렵에 남중국 오나라의 기악무를 배워 백제에 전파시켰으며, 백제 무왕 13년(612)에 일본에 건너가 기악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할 것은 수륙재와 영산재와의 관계성이다. 이에 대해 이성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영산재’란 영산작법의 다른 명칭으로, 추선공양을 목적으로 설행되었지만 《법화경》을 염송하거나 예참하는 상구보리를 추구하는 자력적인 수행의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국불교의 수륙재는 중국에서 성립되어 국내에서는 10세기경부터 개설되었다. 그렇지만 수륙재는 수중중생, 지상중생, 공중중생을 위한 시식에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상구보리의 성향이 강한 영산재와 달리 하화중생의 의례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법화경》의 독송과 공양이 중심인 영산재와 무주나 유주의 고혼을 위한 시식이 중심인 수륙재는 상향과 하향이라는 고유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상호 간의 역할이 보완된 형태로 실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왕생극락을 위한 추선공양의 의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호 간의 역할이 보완되고, 마침내는 유사해져서 영산재와 수륙재라는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점을 주목하면, 영산재와 수륙재는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으며, 또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발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문예학 박사. 국가 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이수자.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 교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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