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밀레이

양들을 망볼 때마다
내 교활한 가슴은 “늑대다!” 외쳐,
시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늑대다! 늑대다!”-그러면 착한
이웃들은 깜짝 놀라, 나를 구하려고
삽과 쇠스랑을 가져오곤 했다.

마침내 내 고함 소리를 모두가 알게 되었다.
거기에 나의 해방이 있었다.
나는 혼자서 늑대와 마주쳤다.
그리고 평온하게 잡아먹혔다.

(최승자 옮김. 《죽음의 엘레지》, 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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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기존의 권위에 기댄 언어의 특징은 상투성이다. ‘살던 대로’의 관성과 ‘하던 대로’의 관행이 상투적 패턴들의 기저를 이룬다. 거기엔 성찰이 없고, 창조도 없고, 진실한 감정도 없다. 오직 언어의 자동 반복과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기계화되는 방식 중의 하나가 상투적 언어 사회의 삶에 스스로를 포획시키는 것이다. 새로울 것이 없는 당연한 언어로만 작동하는 사회는 자기식의 사유가 싹트는 걸 두려워하여 다양한 해석의 서식지를 파괴한다. 예술은 여기에 대한 저항이다. 시인은 절멸 위기에 이른 이 서식지의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다. 상투성에 브레이크를 걸면 질문이 시작되고 질문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우화를 뿌리째 뒤집어엎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 평소엔 가질 수 없던 시인만의 독자적인 해석이 벼락 치듯 순식간에 명멸한다. 보라! 양치기 소년의 거짓 언어는「진정한 마주침」을 외면케 하였다. 순진한 시골 사람들과 착한 이웃들을 기만하는 잔꾀에 취해 위선의 늑대가 가져다 준 권위에 스스로 눈이 먼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해방도 사랑도 없다. 오직 공포의 부추김으로부터 예측 가능한 유희와 갈수록 김이 새서 더 강력한 자극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미혹된 자아만 있을 뿐이다.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 지루한 위선의 언어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되자 외부와의 단절이 오고 마침내 내면을 직시하는 해방의 순간이 찾아온다. 단독자의 힘으로 온전히 늑대의 본래면목과 마주함으로써 소년은 마침내 위선으로부터는 얻지 못한 평온을 얻는다. 삶도 주지 못한 죽음과의 진실한 만남이 가져온 행복한 몰락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늑대를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병환이나 고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니면 무의식의 창고에 처박아둔 트라우마나 치부라고 생각해보자. 유년 시절 강에서 두 번의 사고를 겪은 뒤에 갖게 된 나의 물에 대한 공포라고 생각해보자. 첫 도둑질의 기억이라고 생각해보자. 피하고 싶거나 외면하고 싶거나 배제하고 싶은 어떤 부정적인 요소들과의 정면 승부로서의 시. 여기에서 낡은 각질이 벗겨지는 고통을 기껍게 끌어안는 신생의 몸짓이 온다. 그때의 고통은 축제이며 평화일 것이다. 양치기 소년이 호소한 것은 결국 거짓말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과의 진실한 만남이라고 하겠다. 익숙한 우화의 모형을 전복하는 즐거움을 함께함으로써 우리는 정전이 된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빈센트 밀레이(1892~1950)는 이 자유를 위해「성찬」이란 시에서 “나는 모든 포도나무를 마셨다./ 마지막 것이나 첫 번째 것이나 똑같았다./ 나는 갈증만큼 놀라운/ 포도주는 만나지 못했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갈필에 가까운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 시의 갈증을 돋운다. 최승자 시인 또한 상투적인 세계의 유리벽을 향해 날아가 온몸으로 부딪쳐 노래를 한 새다. 이 풍요의 시대에 갈증과 허기를 잘 발효된 포도주로 삼은 시인들을 만나고 싶다.

1998년 한국일보()와 국제신문(동시)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호랑이 발자국,나무의 수사학,붉은빛이 여전합니까,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등이 있다. 조태일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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