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어떻게 볼 것인가!

 

많은 조사어록 중에 《육조단경》이 중국 선(禪)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가히 독보적이다.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것이 ‘경’(經)인데 후대의 선사가 남긴 말을 ‘경’이라 칭한 것을 보면 그 존재가치를 의도적으로 절대화 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육조단경》자체는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보고 있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육조단경》은 돈황본(敦煌本) · 혜흔본(惠昕本) · 계숭본(契嵩本) · 종보본(宗寶本) · 덕이본(德異本) 등 여러 본(本)들이 있으나 이 중에 돈황본이 가장 오래됐다. 우리나라엔 중국 원나라 시대 몽산 덕이(蒙山 德異, 1231~1308) 선사가 집필한 ‘덕이본’이 주로 학습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돈황본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성철스님에 의해서다. 덕이본은 약 24,000자이다. 반면에 돈황본은 12,000자로 그 분량에서도 두 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후대의 것들은 많은 부분에서 첨삭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같은 주제를 놓고 서로 앞뒤가 상충 되는 경우가 있고 혜능 선사의 본래 가르침에 위배되는 내용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어 기존의 해석본에 대한 많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그런 연고로 부족한 지식이지만 직접 원본과 대조해가면서 서로 모순되게 해석된 부분들을 점검했고 그 과정에서 그간 관념에만 붙들려 있었던 어리석음을 타파해 가는 계기가 되어 오히려 감사할 뿐이다. 돈황본도 약 네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주로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것을 중심으로 한다. 대부분 내용은 압축적이고 문장 또한 미려하지 못하다. 간혹 오탈자도 있어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후 문맥에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번역하였다. 빈승은 본래 학식이 미력한 관계로 학문적 접근 보다는 주로 수행적 측면에 비추어 해석하고자 했다.

전할 수 없는 법을 전하려면

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於法壇經一卷, 兼受無相戒 弘法弟子法海集記
惠能大師 於大梵寺 講堂中 昇高座 設摩訶般若波羅蜜法 受(授)無相戒.

其時座下 僧尼道俗一萬餘人 韶州刺史韋據 及諸官僚 三十餘人 儒士餘人 同請大師 設摩訶般若波羅蜜法 刺史遂令門人僧法海集記 流行後代 與學道者 承此宗旨 遞相傳授 有所於約 以爲禀承

육조 혜능 대사가 소주 대범사에서 법단에서 설한 경 1권과 무상의 계로 전함을 홍법제자 법해가 모아 기록함.

혜능대사께서 대범사 강당 중에 높은 법좌에 올라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무상의 계(戒)로써 이어 주시니 그때에 법좌 아래에는 승려와 도교인, 속인 등 일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 자사인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 선비 몇몇과 사람들이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요청하였다. 아울러 자사는 문인승 법해로 하여금 모든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후대에 잘 전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이 종지를 번갈아 서로 전하고 받아드릴 바를 요약하여 전승토록 하여 이 단경을 설한다.

본문에서 한문의 밑줄친 부분의 ‘수(受)’에 집중하고자 한다. 원문에는 수(受)로 적혀있는 것을 일반적으로 문맥상의 이유로 ‘수(授)’로 수정하여 ‘~무상계를 전해주다.’로 번역하고 있다. 물론 문법적으로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나 상반되는 격변화도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원문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受]이 혜능이 단경을 설한 취지에도 잘 맞는다. 즉 혜능이 본경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무상(無相)’의 법이다. 즉 모든 법은 상(相)이 없음을 경각하며 개념을 대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금강경》의 공사상과 무주상의 원리와도 일치한다. 수(受)를 ‘전해준다.’는 의미로 번역하면 혜능이 법좌에 올라 위대한 반야바라밀을 설할 때, 대중에게 전해줄 ‘일정한 법’이 존재하게 돼서 부처님 가르침에도 어긋날뿐더러 앞으로 《육조단경》에서 펼쳐질 자신의 주장과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황이 발생 된다.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혹자는 이런 필자를 보고 ‘무슨 수행자가 문자에 얽매여 말꼬리 잡느냐!’고 책망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취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기존의 고정된 사고방식을 돌이켜 문자의 의미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육조단경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후 그들의 기존 신앙과 사상인 도교, 유교적 정서에 영향을 받으면서 기득권적 타성에 빠지게 됐다. 자연히 부처님의 종지를 잃어버리게 됐다. 기존의 사회적 통념을 타파해 내지 못하고 지나친 형식과 개념만 중시하는 박제불교가 돼버린 것이다. 《육조단경》은 이런 안타까운 중국불교의 현실을 단박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비주류들의 저항정신이 만들어낸 영적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가장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수계(受戒)법회에서 혜능은 전통적인 불교 의례를 과감히 파괴하고 있다. 이것엔 계(戒)를 내려주기 위한 장엄한 단(壇)도 구비되지 않았다. 삼사칠증의 기본 의례도 갖추고 있지 않다. 오직 홀로 법상에 올라 《반야경》을 설하는 모습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설해지던 《범망경》도 없다. 이런 시도는 파격을 넘어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육조단경》에는 이런 기존의 틀을(법상) 번개처럼 파괴하는 《금강경》의 정신을 담고 있다. 혜능은 자신만의 《금강경》을 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측면에서 《금강경》과 《육조단경》은 시공을 넘어 그 사상적 흐름이 동일하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오자. 일반적인 해석은 ‘혜능선사가 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授)’로 번역한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법은 일정한 상이 없기에 누가 전해줄 수도 없으며 전해 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입을 다물고만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에 부득이하게 ‘무상계(無想戒)’라는 이름을 가차하여 말하는 것뿐이니 개념을 넘는 진정한 계의 의미를 상기하며 이 글을 접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授(수)로 수정하면 그 취지에 맞지 않게 된다. 반면에 受(수)의 의미 중에는 ‘잇다.’라는 의미가 있다. ‘~을 연결하고, ~으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앞 문장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형상이 없는 계로써 이어 주시니’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돈황본의 저술자는 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뒤 문단의 말미에 ‘~번갈아 서로 전(授)하고’의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쓰지 않고 능동과 피동의 격을 분명히 구분해서 쓰고 있다. 즉 受(수)로 쓴 것은 필사본의 오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육조단경》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자는 취지에서 이 첫 구절을 대하는 안목은 대단히 중요하다. 법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자는 대부분 외부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 육근의 대상인 12처에서 의미를 찾는 의도야말로 가장 큰 마구니가 되는데도 말이다. 혜능은 단경에서 ‘선지식을 밖에서 구하면 그르친다.’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금강경》에서도 동일하다. ‘만일 나를 모양으로 보고자 한다면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으며 이는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노자 또한 도덕경 첫 마디에 도(道)를 도(道)의 개념으로는 얻을 수 없다고 전제하며 가르침을 시작한다. 이것은 경을 접하는 처음 마음가짐을 경각시켜주는 일종의 메타인지 장치다. 순간순간 지각되는 지식정보에 붙들리지 않는 의식의 힘을 기르며 개념을 접하라는 궁여지책의 방편일 것이다. 물론 학문을 하는 학자들은 예외일 수 있겠으나 자신(오온)을 깨치고자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에서는 경전을 접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념해야 할 의식의 상태이다. 금강경에서도 질문자인 수보리를 통해서 이런 의식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점검케 하는 경각의 말씀을 해주고 있다. 그러나 수보리조차도 그런 취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모습은 금강경 32분이 끝나도록 찾아보기 어렵다. 이 《육조단경》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돈황본에서는 이와 같은 취지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반면에 후대 덕이본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후대 본은 혜능의 사상 보다는 신수의 사상에 가까운 내용으로 전개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 기준은 간단하다. 고정된 본성이 있는데 그 위를 덮고 있는 번뇌를 털고 닦아내야 한다고 강조하면 그것은 신수의 주장이 된다. 반면에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혜능의 주장이다. 돈황본에서는 혜능의 이런 입장이 일관된다.

-한국불교신문 2022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1)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금강경 사구게)
2)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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