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 별다른 이유 없이 60대의 택시 기사를 주먹으로 폭행한 20대 해군 특수부대 부사관이 공분을 사고 있다. 또 얼마 전엔 서울 신림동에서 칼을 마구 휘둘러 살인과 살상을 저지른 젊은이가 신상이 공개되는 등 우리 사회에 묻지마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부르고 있다.

해마다 ‘묻지마 범죄’가 꼬리를 물고 있다. 대검찰청 범죄 분석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 피의자들은 2000년 306명에서 2005년 319명, 2010년에는 465명으로 늘었다. 10년이 지난 현재 2020년대엔 1천 명을 훌쩍 넘기고 있어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묻지마 범죄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결같이 사회적 단절과 경제적 낙오 등의 소외와 패배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묻지마 범죄’에 대해 일부 언론과 학자들이 ‘우발적 사건’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기론을 가르치는 불교적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어떠한 결과가 있다면 거기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묻지마 범죄’ 역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단절은 끔찍한 범행을 부르는 주원인이다. 실제로 인간은 단절과 고립으로 말미암아 ‘소중한 자아’를 망각하게 된다.

불교는 이러한 단절 및 고립자에 대해 혼자 서게 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며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는 종교다. 여기에는 자비심이 발동돼야 한다. 불교의 자비는 ‘편견없는 아량’이며 모든 존재를 감싸 안는 ‘보편적 자비심’을 기본으로 삼는다.

“내가 존재하듯이 그들도 존재한다. 그들이 존재하듯이 나도 존재한다”는 기본 인식하에 불자라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와 자신을 동등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 사회에 단절자가 나오고 고립된 이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 또한 응당 우리가 함께 져야 한다. 엄중히 말해 ‘묻지마 범죄’는 우리 사회 공동의 책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범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업(業 Karman)의 가르침 중에 공업(共業)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생활여건들은 그 일차적 원인이 자신의 업에 있다. 그러나 산하대지와 함께 우리가 공통으로 받는 과보가 공업(共業)인 바, 쉽게 말하면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복락을 거머쥐는 것은 아니다.

계율을 통해 술과 마약 등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음료를 금지토록 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술과 마약은 한 마디로 인간의 성품을 흩뜨려 놓는다. ‘묻지마 범죄’의 이면에는 음주가 깊은 영향관계를 갖고 있다. 사회적 단절로 인한 패배감에 낙담해 있는 그들에게 술은 잔인한 폭력성을 갖도록 부추긴다. 모든 산하대지와 우주만물이 다 공업중생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 ‘묻지마 범죄’에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음주와 불살생 등 불교의 계율은 이를 실천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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