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이야기】

35.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사랑② 끝

‘취향’과 서열의 영역은 다르다

함양 노용신 명인의 금강주 유명

슬픈 장례식에선 ‘위로’의 친구

술이 그렇듯이 우리 차도 ‘정직’

무라카미 하루키가 찾은 아일라섬의

여름철 여의도 한강다리 부근에서 마시는 위스키 한잔.
여름철 여의도 한강다리 부근에서 마시는 위스키 한잔.

 

바에서 한 주민이 말한다. “맛 좋은 아일레이 싱글몰트가 코앞에 있는데, 왜 일부러 블랜디드 위스키 같은 걸 마신단 말이오? 그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려는 순간에 텔레비전 재방송 프로그램을 트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이 말에 하루키는 감동한 듯하다. 보이차와 싱글몰트의 애호가인 필자 역시도 한편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싱글몰트와 그레인몰트를 섞어서 만든 블렌디드 위스키 역시 천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골라 먹는 재미와 독특한 개성을 존중한 싱글몰트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다른 위스키를 폄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취향의 문제를 절대적인 하이어아키 즉 서열의 영역으로 들고 가서는 안된다.

차 역시 그렇다. 내차는 좋고 남의 차는 아니고, 보이차는 좋고 녹차는 나쁘고 등등. ‘차이’를 넘은 ‘차별’적인 언어의 사용은 차인이든 애주가이든 자신의 수준 즉 품격을 떨어뜨릴 따름이다. 차와 술의 길에서 진정한 취해야 할 바는 ‘겸손’과 ‘존중’이 섞인 배려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일회’는 손님을 대하는 그 누구에게도 중요한 표준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기에 최선을 다해 모신다는!. 다시 안 봐도 되니까 함부로 하는 것과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만큼 인성의 품격을 드러내 준다. 결국 취향은 선택이다. 배려 역시 그렇다. 낭망적인 술과 차를 마시는 당신의 선택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아일레이에서는 술통이 숨을 쉬거든. 창고가 해변에 있어서 술통은 우기 동안 갯바람을 담뿍 머금지. 그리고 건기(6~8월)가 되면, 이번에는 위스키가 그걸 술통 속에서 흠뻑 빨아들이는 거야.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아일레이의 독특하고 자연스러운 향이 생겨나는 거야. 그리고 그 향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는 거지.”

이런 서정적인 대화는 유리병에 담긴 ‘공업’적인 상품으로 다가오는 위스키가 ‘유리’라는 허울을 벗고 ‘차’와 같은 자연 발효 식품으로 다가오게 한다. 실제로 라프로익이나 아드벡, 그리고 라가블린과 같이 피트향이 강한 아일라의 술들은 모두 ‘해초향’이 난다. 스모키하고 정로환 가은 향에 뒤지지 않고 때로는 섞여서 구분도 안되겠지만, 역시 갯벌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우린 아일라의 싱글몰토를 통해서 그렇게 바다를 상싱하고 나아가 추억할 수 있게 한다.

“갯내음이 물씬 풍기는 굴맛과 아일레이 위스키의 그 개성 있는, 바다 안개처럼 아련하고 독특한 맛이 입안에서 녹아날 듯 어우러진다. 두 가지 맛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본래의 제맛을 지키면서도 절묘하게 화합한다.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그런 다음 나는 껍질 속에 남은 굴즙과 위스키가 섞인 국물을 쭈욱 마셨다. 그것을 의식처럼 여섯 번 되풀이한다.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인생이란 이토록 단순한 것이며, 이다지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양수에서 퇴촌부근의 남한강 전경.
양수에서 퇴촌부근의 남한강 전경.

 

예전에 동해나 남해안에 가서 겨울 바다를 볼 때면, 드럼통에 불을 때면서 술 한잔을 걸치는 어부들을 본 적이 있다. 그분들 역시 굴에 소주를 부어서 생면부지의 우리에게도 한 잔씩 먹어보라고 애주가의 ‘인정’을 나누곤 했다. 한국과 스코틀랜드, 동서양 어부들에게 굴과 궁합이 맞는 술의 발견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겨울철 집에서도 굴을 살짝 익혀서 그 껍질에 함양 병곡의 노용신 명인이 만든 금강주를 부어 마신 적이 있다. ‘술꾼’들의 행복찾기는 이미 ‘글로컬’의 단계를 거쳐간 듯하다.

우리는 장례식에서도 위스키를 마시지…. 묘지에서 매장이 끝나면 모인 사람들에게 술잔을 돌리고 이 고장에서 빚은 위스키를 술잔 가득 따라주지. 모두 들 그걸 단숨에 비우는 거야. 묘지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춥고 허전한 길. 몸을 덥히기 위해서 말이야. 다 마시고 나면, 모두 들 술잔을 바위에 던져서 깨버려. 위스키 병도 함께 깨버리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그것이 관습이거든

아기가 태어나면 축배로 드는 위스키가 슬픈 장례식에서는 불운을 떨치고 위로를 하는 ‘친구’가 되어준다.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서 즐기는 나만의 술이 때로는 모두와 함께 하며 번잡하지만 조용히 어둠을 걷어내 주는 서광처럼, 슬픔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다.

“15년 된 위스키(라프로익)에는 15년 동안 숙성된 완고한 맛이 있다.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는 경박한 알랑거림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는다.”

일면 멋있는 자토이치와 같은 맛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위스키는 블렌딩이라도 해도 역시 보관하는 방식, 따르는 법, 사용하는 술잔, 에어링의 정도, 술 먹는 환경, 함께 하는 물의 종류, 함께 하는 사람 등에 따라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리고 어떤 술자리에서도 술은 정직하다. 라프로익의 개성은 독특하지만 그렇다고 라프로익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차도 그렇다.

35회를 맞이하여 차 이야기를 일단락짓고자 한다. 다음에 더 풍부한 내용으로 독자들과 만나기를 기약해본다.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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