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이야기】

34.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사랑

작가 하루키는 위스키 애호가

몇몇 문장서 새 표현방법 제시

“술은 산지에서 마셔야만 제맛”

“위스키도 차도 모두 우리 언어”

나마스떼코리아가 기획한 예향재 월례 차문화강좌 모습.
나마스떼코리아가 기획한 예향재 월례 차문화강좌 모습.

 

수많은 베스트셀러로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킨 세계적인 소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뿐만 아니라 2001년 4월 25일에 초판 발행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을 발행한 위스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문화사상에서 2020년에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 위스키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성지여행》(무라카미 요오코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수정판이 나와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평범한 사진에 별다른 내용이 없는 이 책이 4판 5쇄를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위스키 열풍 때문일까? 유튜브 채널 ‘주락이월드/14F’에서 조승원 기자가 소개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이 책이 성공(?)한 비결은 실제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명성과 위스키 부분에 대한 읽을 만한 인문학적 서적이 많지 않은 점이 한몫한 것 같다는 평가도 없진 않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식의 몇몇 문장은 위스키에 대한 서정적 그리고 감성적 표현과 관련하여 새로운 표현방식을 제시하고 있어 읽어볼 만한 부분이 없지 않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권말에 있는 옮긴이(이윤정)의 말 ‘위스키 테마여행의 맛과 멋’에 요약된 저자의 표현 몇 개만을 읽어도 될 듯하다. 하지만 옥의 티도 없지 않다.

달달위스키의 시음회 모습.
달달위스키의 시음회 모습.

 

“술이라는 건 그게 어떤 술이든 산지에서 마셔야 제맛이 나는 것 같다. 그 술이 만들어진 장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 물론 와인이나 정종도 마찬가지다. 맥주 역시 그렇다. 산지에서 멀어질수록 그 술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바래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흔히 말하듯이,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

언뜻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를 듯하다가, 이어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굳이 이해 못할 이유가 없어진다.

“수송이나 기후의 변화에 따라, 혹은 그 술이 지닌 일상적인 실감으로 조성되어 음용되는 환경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거기에 들어 있는 향이 미묘하게 어쩌면 심리적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그 산지에서 마셔야만 제맛을 음미할 수 있다.”

싱글몰트 애버펠디 28년산 한잔.
싱글몰트 애버펠디 28년산 한잔.

 

우리가 보통 술을 마실 때 페어링할 음식 즉 안주를 말할 때 술의 산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스카치의 경우 전통민요 등이 삽입된 스코틀랜드의 절경에 대한 4K 동영상을 유트뷰에서 찾아 틀곤 한다. 나아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음악가의 음악을 듣고, 스코틀랜드 작가의 그림을 보고 그 지방의 특산물과 음식을 찾아 마시기도 한다. 그래도 위스키를 즐기기에는 물론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산지에서 마시는 것이 좋긴 하다. 하지만 가까울수록 맛있다는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고 ‘강요’나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곳에 깃들어 있던 친밀한 공기와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그러고 있노라면 내 손 안에 쥐어진 술잔 속에서 위스키는 조용히 미소짓기 시작한다”

그렇다. 환경도 버츄얼이 아닌 리얼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사람들과의 소통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정이 넘치는 현지 사람들의 마음이 정성으로 변화하여 담긴 술 한 방울에 찬사를 보내며 마시는 위스키는 그 어떤 환경의 재현보다 소중하다. 거꾸로 그런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어디서 한잔을 하든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위스키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우리의 차와도 다르지 않다. 음료이며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부분이 없진 않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하루키는 여기서 ‘불립문자’라는 화두를 깨기도 한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일들을 술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의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어 놓고 이야기하고, 그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채우고 비우는 차처럼, 위스키도 받고 마시면서 똑같은 일상의 패턴을 번복한다. 하지만 그런 평범하기에 소중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주고받음 안에도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굳이 불교의 진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언어는 문자를 여의고 그 자리에 위스키나 차로 대신하면 된다. 한적한 곳에서 마시는 한잔의 차의 여유와 위스키의 위로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유를 얻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한 방울의 차와 위스키에는 만든이, 옮긴이, 마시는 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문맥(context)으로 함께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스키도 차도 우리의 언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글렌알라키 15년산 한잔하고 하루를 마무리해야겠다.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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