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국에 첫 폭염주의보가 발효되면서 올여름 무더위 기승이 심상치 않다. 34도까지 치솟던 6월 18일, 기상청은 전국에 예년보다 이른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고온다습한 무더위는 열대성 기후의 폭우도 동반하는데, 7~8월 기상청은 평년보다 극심한 집중호우를 예상하고 있으므로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를테면 2022년 여름, 강남 한복판에서의 물난리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반지하방에서 세 가족이 익사한 인명 사고에 있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이런 물난리의 피해자셨다. 현재는 임대아파트로 거처를 옮기셨지만, 수년 전 어머니께서는 변변찮은 형편에 좁은 반지하방에 거주하셨다. 환기도 잘 안 되고 비가 오면 물이 들이치는 암울한 환경이었다. 벽지마다 시커먼 곰팡이가 그득해 숨쉬기도 버거운 상황에서도 어머니께서는 단 한 번의 불평불만도 없으셨다. 그럼에도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 바로 내 어머니셨다. 이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감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배태되어 속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나의 존재 이유에 있었다.

비로소 나는 어머니의 기구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중매를 통해 결혼한 남편은 알고 보니 5살이 아닌 10살이 많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폐결핵이라는 오랜 고질병을 앓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가구 장인으로 제자를 양성하는 직업을 갖고 계셨는데, 장남으로서 부모, 형제까지 삼대를 책임지느냐 각혈을 하시면서도 일을 다니셨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그런 여의치 않은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온 어머니께서는 나를 임신하셨던 때에도 궂은 집안일을 감당하셨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너무 힘들어 시래기만 먹으며 버티셨다고 하신다. 그토록 무더웠던 한여름, 어머니께서는 병원비도 없으셔서 나를 집에서 낳으셨다. 그것도 모자라 출산 후 생계유지를 위해 어머니는 젖이 퉁퉁 불어나도록 바깥일도 함께 병행하셔야 했다. 그런 간절함을 하늘은 몰라주었던 것일까? 아버지께서는 몹시도 추운 85년의 어느 겨울날 영면하셨고 깊은 산속 사찰의 하늘 위로 흩뿌려지셨다. 그 후 어머니께서는 안 해 본 일이 없으셨다. 이후 어머니의 육신에는 수술 자국이 점점 늘어만 갔다.

자궁 근종이 8개가 생겨서 한 달 동안 하혈을 하실 동안에도 식당일이 바빠 병원을 못 가시던 어머니, 수술 후에도 밤이 늦도록 궂은일을 다 감당하시느라 수술한 부위가 터져 탈장이 될 때까지 통증 주사로 버티시던 어머니, 척추의 연골이 3개가 다 닳아도 일만 하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간병하고 씻겨 드리던 25살이 되던 어느 날, 나는 뒤에서 세찬 바람을 맞았던 어머니의 을씨년스러운 삶을 반추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내 나이 42세가 된 현재, 아이 둘을 양육하면서 나는 지나간 어머니의 삶의 그림자를 밟으며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뜨거운 가슴을 부둥켜안고 운다.

올해로 73세가 되신 어머니께서는 아직까지 일을 하고 계신다. 몸이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움직일 수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하시면서 자식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장애인 복지관에서 청소를 하고 계신다. 그 어떤 폭염에도, 폭우에도 굴하지 않으시며 직장까지 30분을 걸어 다니시는 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시다. 나는 그렇게 강인한 어머니가 자랑스럽지만 수술로 인하여 장애인 등록을 하고 노인처럼 허리가 굽었다며 자신을 부끄러워하신다. 하지만 나는 늘 어머니께 말씀드리곤 한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자랑스러워요. 어머니의 허리는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셨다는 훈장이니까요.” 자신의 몸이 쇠하도록 평생 일만 하시면서도 자신보다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시는 어머니께서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절에 가서 빌고 또 비신다. 그런 굳건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그려 보곤 한다. 이제야 나지막이 고백해 본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어머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문학평론가ㆍ 2023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평론 입상자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