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유정, ‘증영진’, ‘남종선’, ‘증정응선자’

 

편양 언기, 소요 태능, 정관 일선과 함께 서산4대 문파 중의 한 분인 사명 유정(1544∼1610)의 속성은 임씨, 속명은 응규, 법명은 유정, 호는 사명, 종봉, 송운 등이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이다. 사명은 15세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 화상의 제자가 된 후, 18세에 선과(禪科)에 장원급제하고 이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경전을 배웠다. 30세에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후일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서산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수행하고 법을 이었다. 그 후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지를 행각하며 수행하다 43세 되던 해 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한밤의 소나기에 뜰의 꽃들이 모두 떨어진 것을 보고 무상의 진리를 터득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영산회상의 법문에서 유래된 ‘교외별전’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말한다. ‘교외별전’은 이후 남종선에서 크게 선양되었다. 사명은 ‘영진에게 주다(贈靈眞)’에서 육조 혜능의 게송을 차용하여 자신의 선지도 혜능의 남종선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노로 남종의 자손으로는 盧老南宗子
천추에 바로 그대 한 사람 千秋汝一人
영대가 밝은 태양처럼 빛나거니 靈臺照白日
어디에 먼지가 일어날 리 있으랴 何處有生塵

‘남종’은 조계의 선종을, ‘노로(盧老)’는 육조 혜능을 가리킨다. 이 게송의 마지막 부분을 혜능이 신수의 게송에 대한 답한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중 마지막 행을 거의 그대로 차용하면서 육조를 선양함은 물론, 육조의 남종선을 계승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혜능의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와 티끌이 낄 수 있겠는가(何處惹塵埃)’와 사명의 ‘어디에 먼지가 일어날리 있으랴(何處有生塵)’는 동일한 의미이다. ‘교외별전’인 선(禪)이야말로 ‘참다운 소식’임을 강조한 사명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마음 달은 휘영청 밝아 빛이 갈수록 선명하고 心月高明色轉鮮
자비의 꽃은 옥산처럼 고독하고 견고해라 悲花玉立且孤堅
정신을 집중하여 성오하니 정채가 발하고 神凝有省生精彩
안목을 정하니 허공 꽃 없이 장연을 벗었어라 眼定無花脫障緣
선은 남종을 위해 단단히 무장을 하였고 禪爲南宗荷戈甲
시는 북야와 짝하며 새 시를 앗았다오 詩從北野奪新

화두 참선을 통한 사명의 마음은 밝고 선명하고,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은 옥산처럼 견고하다. 정신을 집중하여 삼매에 드니 바른 광명이 한없이 비추이고, 정법의 안목을 올바로 갖추고 나니 세상의 허망함을 벗고 모든 장애를 끊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남종선’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외에 또 어느 종파가 진리 주변에 있겠는가라고 노래한다. 사명의 이러한 깨달음을 향한 화두 참구의 강조는 다음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조주의 동쪽 뜰 앞의 천년 된 잣나무 趙州東院千秋栢
묻는 이에게 바른 안목 곧장 보여 왔네 直示當人正眼來
호랑이 묶어 잡듯 얼른 참구할 것이니 叅究早時如縛虎
길 잃고 헤매며 티끌 속에 치달리지 말라 跉跰切忌走塵埃

선종의 유명한 공안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는 어떤 승려가 조주 종심(778~897)에게, 달마가 서쪽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 와 불법을 전한 진의가 무엇인지를 묻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던 일화에서 유래한다. 사명은 이 공안을 사용하면서 그대들도 마치 호랑이를 잡아 묶듯 재빨리 화두를 붙들고 참구하여 더 이상 티끌진애의 세상사에 치달리지 말고 곧바로 깨달음에 이를 것을 당부하고 있다.

만법은 원래 허공 속의 꽃이거니 바닷속의 모래를 세기만 해서야 어찌 도를 이룰 수 있겠는가를 말하는 사명은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은산철벽을 뚫고 나가는 불굴의 힘과 용기가 필요함을 설파한다. ‘정응 선자에게 주다(贈正凝禪子)’이다.

부생의 생사가 번갯불보다 빠르나니 浮生存沒速流電
굴레 벗어나는 일 바삐 서둘러야 하네 脫却籠頭早著忙 
은산철벽 저쪽으로 한번 몸을 굴려야만 鐵壁那邊翻一轉 
비로소 고향에 돌아가리라 此時方得到家鄕

은산철벽은 앞뒤가 꽉 막혀 중생의 생각과 이치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의심 덩어리인 화두 그 자체를 말한다. 곧 은산철벽과 같은 화두에 물러서지 않고 완벽하게 몰입되면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가 되는데, 바로 그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듯 한 순간에 몸을 돌려 화두를 뚫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생사를 여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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