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차도의 길, 주도의 길

차, 완성품 아닌 찌개같은 요리

일회용컵에 차 마셔도 괜찮아

위스키 역시 주도(酒道)가 있다

술은 인간과 신의 소통에 기여

타이페이 한 유명 보이찻집의 팽주자리.
타이페이 한 유명 보이찻집의 팽주자리.

 

차는 어떻게 마셔야 할까?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우, 자판기에서 나오는 커피를 담은 종이컵도 애용한다. 술이 없어서 못 먹지 ‘컵’이 없어서 못 먹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코홀릭(중독)이라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잭다니엘 같은 양주를 그냥 병째로 벌컥벌컥 마시면 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커피 때 묻은 종이컵을 재활용하는 것은 왜일까?

나름대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 발현이나 신이 내린 술에 대한 예우(?) 등을 그 이유로 고려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도구적인 인간으로서 ‘술꾼’에게 없으면 모르겠지만, ‘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을 ‘무의식적인 이유’는 찾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말은 걸리버여행기 4부에 나오는 거짓말이 없는 나라 후이늠에서 인간야후를 표현할 때 쓰는 언어일 때 가능하다. 21세기 신인류 MZ세대에는 걸맞지 않은 차별적인 소위 ‘부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

술꾼이라는 표현은 뭐하지만,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좋은’ 술은 어디에 따라 마셔도 좋다고 한다. 대부분의 애주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오픈런 등으로 ‘핫’한 싱글몰트를 마실 때, 정품 글렌캐런 크리스탈 글라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준비하지 못한 긴급상황일 때는 부득이하게 종이컵으로 응급조치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타이밍’이라는 ‘시절인연’인 것은 아닐까 싶다. 맥캘란 30년산을 먹으라는데 ‘잔’이 없다고 안마실 애주가는 없을 것이 때문이다.

이렇게 애주가들은 술을 마시기 위한 도구보다는 ‘술’을 좋아한다. 하지만, ‘차’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차는 마시기 위해서 컵 즉 ‘잔’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찻물도 필요하고 주전자인 차호 그리고 숙우(공도배)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호스트인 팽주에 따라 차와 물의 양, 온도 조절, 시간 등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차’는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의 찌개나 일본의 ‘나베’와 같은 요리가 아닐까 싶다.

이런 차이 때문에 애주가는 ‘술’을 사는데 대부분의 돈을 쓴다. 하지만 차인들은 차가 아니라 ‘차도구’에 보다 많은 돈을 쓴다고들 한다. 보이차의 경우 다를 수도 있지만, ‘자사차호’ 등을 고려해 보면, 다구의 몫이 적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차 관계자들 특히 제다장인들은 우리 차인들이 ‘뭐가 중헌디’ 모른다고 지적한다. 물론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차의 경우, 단순한 취미생활을 떠나서 정신적 수양 수행의 매체이기도 하다.

타이페이 카발란 바의 바텐더 자리.
타이페이 카발란 바의 바텐더 자리.

 

술을 사람을 취하게 하지만, 차는 사람을 깨치게 하는 대조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서로 장단점을 비교하기에는 지면이 턱없이 작다. 다음에 천천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다음을 기약한다. 다만, 한가지 말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정말 좋은 차는 분식집에서 쓰는 일회용 종이컵에 그냥 우려 마셔도 좋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구 온난화 등의 환경 문제로 인해서 앞으로 폐기될 종이컵이긴 하지만, 요점은 아무리 수행의 수단이거나 수행 그 자체라고 하더라도 다도가 아닌 ‘차’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MZ세대가 싱글몰트에 꽂힌 이유는 많다. 하지만 완성품이지만 블랜디드와 다르게 스스로가 맛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소위 선진국의 국민일수록 ‘자기 결정권’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다. 수십 년 아니, 겨우 수년이 지나 우리는 그런 욕구가 강한 세대를 ‘MZ’라고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빠른 욕구의 팽창이 우리나라를 어디로 향하게 할지 그 향방에 수많은 관심이 쏠린다.

수많은 싱글몰트를 먹다 보면, 언제가 애주가들은 스스로 블랜딩(혼합)할 수 있는 ‘마스터 블랜더’를 꿈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쉐프(주방장)는 아니더라도 요리사나 다도에서의 팽주와 다르지 않다. 그런 욕구를 가진 다른 동호인들이 원한다면 바텐더가 아닌 마스터 블랜더로서 테이블 앞에 우뚝 서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것 같다.

차에만 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스키 역시 주도(酒道)가 있다. 통제력의 상실을 막는 강인한 정신력이라는 측면에서 주도 역시 정신적인 수양이 될 수 있다. 사실 다도의 것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고대 제의에서 비롯된 천신에게 ‘술’을 바치는 헌주의식은 헌다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정성을 담은 술을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은 인간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리 길지 못했을 것 같다. 여하튼 ‘취하다’는 표현은 각자에게 의미가 다르겠지만, 술은 우리 인간의 정신 즉 영혼을 맑게 해주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먹은 마음과 신이 품은 뜻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술이라고 여겨진다.

신선이나 신을 꿈꾸는 주도와 차도, 술잔과 찻잔, 술과 차와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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