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이야기】

32. 차곡차곡의 세계

럼주, 영국 해군 수병의 자존심
홍차·스카치·진이 럼주 대체품
마크트웨인, 천국에 안갔을 것
‘맛’은 주변 상황에 의해 좌우돼

크리스마스 홍차 주전자와 1961년산 럼주.
크리스마스 홍차 주전자와 1961년산 럼주.

 

영국에서 홍차의 인기는 여전히 대단하다. 굳이 애프터눈티를 찾지 않더라도 길거리에서조차 ‘홍차의 나라’ 영국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많은 찻집을 보게 된다. 1890년경부터는 전 국민이 즐겨 마시는 국민음료가 된 홍차는 영화 〈덩케르크〉(Dunkirk)>에서 보이듯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 형태로 국민들은 물론 전장의 군인들에게도 보급되었다.

군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은 해군에게는 ‘홍차’ 말고도 하나를 더 배급했다. 다름 아닌 럼(Rum)이다. 럼주는 1655년부터 배급되기 시작하여 영국 해군의 상징이 될 정도로 300년 넘게 영국 해군 함선의 필수품이었다. 제조단가가 싸다 보니 해적이나 노예들이 마시던, 거칠고 조악한 술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1980년 우리나라의 양주 시대를 연 최초의 럼 ‘캡틴 큐’도 그 트레이드마크가 애꾸눈 해적이 된 것 같다.

여하튼 선원들이 많이 마셔왔던 술, 럼은 사탕수수로 만들어서 맛이 달콤하다. 따뜻한 우유에 달콤한 향이 일품인 럼주를 타서 마시면 몸이 나른해지고 긴장이 풀리면서 감기 치유에 필요한 푹 쉴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한다. 이런 점을 활용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엔 뜨거운 우유에 럼주를 넣고 설탕(또는 꿀)을 넣어서 숙면 칵테일 ‘나이트캡’을 만들 수 있다.

우유 대신에 따뜻한 홍차 한 잔도 좋다. 전통 러시아식 차는 진한 홍차에 레몬을 넣거나, 벌꿀이나 잼을 넣어 달게 만든다. 럼주 대신 보드카를 넣어 마시기도 하는데, 다른 양주인 위스키도 좋다. 집에 한 병쯤 있는 위스키에 뜨거운 홍차를 1:2 비율로 섞고 꿀 한 스푼을 넣은 다음 레몬 슬라이스를 하나 띄우면 따끈한 티 칵테일인 ‘핫 토디’가 완성된다.

토트(Tot)라고 불린 영국 해군용 럼주는 영국 수병의 자존심이자 힘든 선상 근무를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물을 구할 수 없는 먼바다에서는 생명수와 같았던 럼주와 홍차의 만남은 굳이 칵테일 이름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매칭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깨끗한 물을 보존하는 냉장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잦은 주취 사고로 인해 럼주는 1970년 7월 31일 즉 ‘블랙토트데이(Black Tot day)’에 영국 해군 함선에서 퇴출되었다. 국방장관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영국 의회에서 “Great Rum debate”이라고 ‘위대한 럼에 관한 토론회’를 열어서 격론할 정도로 ‘럼’의 위상은 컸다.

대만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의 테이스팅 모습.
대만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의 테이스팅 모습.

 

이젠 럼주가 있었던 그 자리를 홍차와 스카치 그리고 진 등의 차와 술이 차지하고 있을듯싶다. 차 특히 홍차는 ‘럼’ 이외에 그 어떤 술을 넣어도 대체로 잘 어울리는 차이다. 40도 이상의 술이면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든다. 이런 실험을 보이차에도 해 보았는데 홍차보다 더 술의 맛을 즐기기가 좋다. 홍차와 위스키의 만남은 두 개의 폭탄을 터트린 것 같은 맛이 난다. 하지만 보이차와 위스키는 조화로운 맛이 나고 특히 숙차와 노차의 경우는 그 균형 잡힌 맛이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런 차와 위스키의 조합을 접하게 되면, “무엇이든지 지나친 것은 나쁘지만, 좋은 위스키는 아무리 지나쳐도 늘 부족하다. 그래서 버번(위스키)을 마실 수 없다면 천국이라도 가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 마크 트웨인이 떠오른다. 《톰 소여의 모험》(1876), 》왕자와 거지》(1881),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을 지은 미국 문학의 아버지인 그는 아마도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천국에는 가지 않았을 듯싶다.

여하튼 차의 종류나 양, 마찬가지로 위스키의 종류와 양 그리고 숙성 연도 등에 따른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맛이 떨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차와 술은 다 맛있지만, 그 가운데 더 그날의 내게 잘 맞는 차와 술이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나쁜 위스키는 없다. 다만 좋은 위스키가, 더 좋은 위스키가 있을 뿐이다”라는 스코틀랜드 속담이 잘 다가온다. 사실 위스키 대신에 사람을 넣을 수 있고 그 무엇도 넣을 수 있으면 매우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는 인간의 혀가 간사하다고 한다. ‘안이비설신의’의 육식 가운데 네 번째에 해당하는 ‘혀’는 미각을 관장한다. 그런데 ‘맛’이라는 것이 정말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주변 상황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된다. 언제 마시는지. 누구랑 마시는지. 어디서 마시는지. 지금 몸과 마음의 상태는 어떤지. 관계성의 문제도 있지만, 도구나 물 등의 영향도 크다.

위스키 등의 술도 그렇지만, 차만해도 제조연도인 빈티지, 재배지역인 떼루아. 제조방법과 공정, 만든 사람인 장인, 차를 따는 채엽 시기와 기술 등이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 외에도 찻물, 찻잔을 비롯한 다구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나아가, 함께 하는 음악, 음식, 꽃, 그림 역시 무관하지 않다. 이런 디테일한 환경 속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온전하게 맛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다. 줘도 못 먹고 마셔도 못 느끼는 그런 ‘고정관념’의 틀에 빠지면 아무리 전문가인 차인이라도 이미 다도의 길에서는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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