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이야기】
32. 차곡차곡의 세계
럼주, 영국 해군 수병의 자존심
홍차·스카치·진이 럼주 대체품
마크트웨인, 천국에 안갔을 것
‘맛’은 주변 상황에 의해 좌우돼
영국에서 홍차의 인기는 여전히 대단하다. 굳이 애프터눈티를 찾지 않더라도 길거리에서조차 ‘홍차의 나라’ 영국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많은 찻집을 보게 된다. 1890년경부터는 전 국민이 즐겨 마시는 국민음료가 된 홍차는 영화 〈덩케르크〉(Dunkirk)>에서 보이듯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 형태로 국민들은 물론 전장의 군인들에게도 보급되었다.
군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은 해군에게는 ‘홍차’ 말고도 하나를 더 배급했다. 다름 아닌 럼(Rum)이다. 럼주는 1655년부터 배급되기 시작하여 영국 해군의 상징이 될 정도로 300년 넘게 영국 해군 함선의 필수품이었다. 제조단가가 싸다 보니 해적이나 노예들이 마시던, 거칠고 조악한 술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1980년 우리나라의 양주 시대를 연 최초의 럼 ‘캡틴 큐’도 그 트레이드마크가 애꾸눈 해적이 된 것 같다.
여하튼 선원들이 많이 마셔왔던 술, 럼은 사탕수수로 만들어서 맛이 달콤하다. 따뜻한 우유에 달콤한 향이 일품인 럼주를 타서 마시면 몸이 나른해지고 긴장이 풀리면서 감기 치유에 필요한 푹 쉴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한다. 이런 점을 활용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엔 뜨거운 우유에 럼주를 넣고 설탕(또는 꿀)을 넣어서 숙면 칵테일 ‘나이트캡’을 만들 수 있다.
우유 대신에 따뜻한 홍차 한 잔도 좋다. 전통 러시아식 차는 진한 홍차에 레몬을 넣거나, 벌꿀이나 잼을 넣어 달게 만든다. 럼주 대신 보드카를 넣어 마시기도 하는데, 다른 양주인 위스키도 좋다. 집에 한 병쯤 있는 위스키에 뜨거운 홍차를 1:2 비율로 섞고 꿀 한 스푼을 넣은 다음 레몬 슬라이스를 하나 띄우면 따끈한 티 칵테일인 ‘핫 토디’가 완성된다.
토트(Tot)라고 불린 영국 해군용 럼주는 영국 수병의 자존심이자 힘든 선상 근무를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물을 구할 수 없는 먼바다에서는 생명수와 같았던 럼주와 홍차의 만남은 굳이 칵테일 이름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매칭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깨끗한 물을 보존하는 냉장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잦은 주취 사고로 인해 럼주는 1970년 7월 31일 즉 ‘블랙토트데이(Black Tot day)’에 영국 해군 함선에서 퇴출되었다. 국방장관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영국 의회에서 “Great Rum debate”이라고 ‘위대한 럼에 관한 토론회’를 열어서 격론할 정도로 ‘럼’의 위상은 컸다.
이젠 럼주가 있었던 그 자리를 홍차와 스카치 그리고 진 등의 차와 술이 차지하고 있을듯싶다. 차 특히 홍차는 ‘럼’ 이외에 그 어떤 술을 넣어도 대체로 잘 어울리는 차이다. 40도 이상의 술이면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든다. 이런 실험을 보이차에도 해 보았는데 홍차보다 더 술의 맛을 즐기기가 좋다. 홍차와 위스키의 만남은 두 개의 폭탄을 터트린 것 같은 맛이 난다. 하지만 보이차와 위스키는 조화로운 맛이 나고 특히 숙차와 노차의 경우는 그 균형 잡힌 맛이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런 차와 위스키의 조합을 접하게 되면, “무엇이든지 지나친 것은 나쁘지만, 좋은 위스키는 아무리 지나쳐도 늘 부족하다. 그래서 버번(위스키)을 마실 수 없다면 천국이라도 가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 마크 트웨인이 떠오른다. 《톰 소여의 모험》(1876), 》왕자와 거지》(1881),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을 지은 미국 문학의 아버지인 그는 아마도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천국에는 가지 않았을 듯싶다.
여하튼 차의 종류나 양, 마찬가지로 위스키의 종류와 양 그리고 숙성 연도 등에 따른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맛이 떨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차와 술은 다 맛있지만, 그 가운데 더 그날의 내게 잘 맞는 차와 술이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싶다. 이런 측면에서 “나쁜 위스키는 없다. 다만 좋은 위스키가, 더 좋은 위스키가 있을 뿐이다”라는 스코틀랜드 속담이 잘 다가온다. 사실 위스키 대신에 사람을 넣을 수 있고 그 무엇도 넣을 수 있으면 매우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는 인간의 혀가 간사하다고 한다. ‘안이비설신의’의 육식 가운데 네 번째에 해당하는 ‘혀’는 미각을 관장한다. 그런데 ‘맛’이라는 것이 정말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주변 상황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된다. 언제 마시는지. 누구랑 마시는지. 어디서 마시는지. 지금 몸과 마음의 상태는 어떤지. 관계성의 문제도 있지만, 도구나 물 등의 영향도 크다.
위스키 등의 술도 그렇지만, 차만해도 제조연도인 빈티지, 재배지역인 떼루아. 제조방법과 공정, 만든 사람인 장인, 차를 따는 채엽 시기와 기술 등이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 외에도 찻물, 찻잔을 비롯한 다구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나아가, 함께 하는 음악, 음식, 꽃, 그림 역시 무관하지 않다. 이런 디테일한 환경 속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온전하게 맛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다. 줘도 못 먹고 마셔도 못 느끼는 그런 ‘고정관념’의 틀에 빠지면 아무리 전문가인 차인이라도 이미 다도의 길에서는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