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여성참정 제한, 장자상속,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지배와 선주민 몰아내기. 이런 행위들이 한때 세상을 활보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관행, 관습, 문화의 일부가 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장치로 기획되어 작동되었던 적이 있었다.

엄밀한 사실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자연과학에서도 거짓이 지배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동설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겠다. 자연과학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가 더 넓다. 그러니 우리가 상식 또는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계속 의심의 눈길을 주어야 한다.

사실이 아니거나 삶을 억압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떨쳐내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며 용기 있는 행동이다. 지혜와 용기를 행한 이들에 의해 우리의 삶의 조건은 개선되었으며, 이를 진보라고 칭한다. 보수에 대칭하여 이념의 틀 속에 욱여넣어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 행세를 해왔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이지만, 언젠가는 바뀌어 낡은 생각이 될 터이다. 인간이 그 권세를 누릴 날이 그리 많지 않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하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다.

지구법은 낯선 개념이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지구중심적 시각으로 법을 바꾸자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지구법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인간은 더 넓은 존재공동체, 곧 지구공동체의 한 부분이고, 지구공동체의 각 성원의 안녕은 전체로서 지구의 안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고에 바탕한 법과 거버넌스에 관한 철학.” 지구에는 2022년 11월 15일 현재 80억 명이 살고 있다. 지구는 위태롭다. 기상 이변은 너무 자주 나타나 더 이상 이상기후라 부를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비가 오지 않아도 홍수주의보가 발령될 정도인데, 이는 이상고온으로 빙하가 녹기 때문이다. 공상 속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 마주친 현실이다.

지구는 자기를 보존하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어릴 적 모래를 둥그렇게 쌓아놓은 후 작대기를 꽂아 넘어뜨리는 사람이 벌칙을 받는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모래를 한 주먹 덜어내도 작대기는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한 알갱이만 덜어내도 작대기가 넘어지게 된다. 한계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구는 지금 한계상황에 이른 것이 아닐까. 요한 록스트룀 등의 과학자들이 지구의 한계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연구에 나섰다. 지구의 유지를 위해 넘어서는 안 될 지점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2009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인류를 위한 안전한 운용 공간’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행성경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류가 지켜야 할 생존의 공간적 한계를 뜻한다.

요한 록스트룀은 이어 마티아스 클룸과 함께 연구 결과를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라는 책으로 내놓았다. 이 책에 따르면, 행성경계를 결정짓는 아홉 가지 요소 중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 손실률, 토지 이용의 변화, 담수 소비, 질소와 인에 의한 오염 등 다섯 가지에서 한계를 넘었다. 지구가 인간의 삶을 지탱해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지구법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지구는 인간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온갖 동식물이 산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도 지구의 주체들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려주셨다. 인간이 지구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지배자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유지자로 지위를 전환해야 하며, 그것을 촉구하고 공생의 지구공동체를 제도적으로 만들어가자는 것이 지구법이다. 지구법이라는 새로운 상식이 태동하고 있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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