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심우장’, ‘오도송’, ‘춘주(春晝)’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일제의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다 생을 마감하였다. 무엇보다 만해는 은유와 상징, 비유와 역설을 통하여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불후의 시집 《님의 침묵》이다.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은 만해가 말년(1933~1944), 조선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짓고 살았던 곳으로, 이 택호는 소[自性]를 찾는다는 뜻이다. 만해는 원적에 드는 날까지 이곳에서 사상을 심화시키고 선(禪)을 깨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만해의 문학적 향기와 민족사랑, 법향을 느끼기 위해 ‘심우장’을 찾고 있다. ‘심우장’에 들어서면 커다란 현수막에 새겨진 ‘尋牛壯’이라는 한글 선시가 눈길을 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하다면
차라리 찾지나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 살아가리라는 만해의 외로운 결기와 단단하고 매운 자아성찰이 잘 드러나 있다. 마음이란 늘 가까이 있느니 애써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일체종지가 모두 자신 안에 있으므로 잃을 것이 없다. 그런데 마음 밖에서 소[自性]를 찾는다고 법석을 뜨니 우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여의 세계는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보면 모든 것이 다 부처의 법신이기 때문이다.

만해는 설악산 오세암에서 동안거 중이던 1917년 12월 3일 밤, 깊은 선정삼매에 들던 중 매서운 바람소리와 눈보라 속에 여태껏 찾아 헤맨 ‘고향’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음은 그 ‘오도송’이다.

남아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그 몇이나 객수 속에 오래 있었나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를 깨뜨리니
눈 속에 복사꽃이 조각조각 붉기만 하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

오랜 객수 속에 갇혀 있다가 이를 벗어남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임을 깨달은 것이다. 주인으로서 주인의 행세를 하지 못하고 나그네 민족의 극한적 아픔을 내면으로 삭이며 진정시키고 어둠에 가렸던 공간을 해체함으로써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만해 자신이 처한 조선의 땅이 바로 피안의 세계요, 일제하의 우리 민족이 겪는 그 아픔자리가 바로 고향임을 깨달은 것이다.

자연과의 긴밀한 교감과 조화를 바탕으로 마음을 맑히면서 수행정진에 깊이를 더하였던 만해는 자연물과 하나 되어 내적 일체감을 획득한다. 눈 오는 밤에 달과 매화, 오동나무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는 모습을 한 폭의 산수화로 묘사한 ‘청한(淸寒)’은 그 대표적이다.

달을 기다리는 매화는 학처럼 서 있고
오동에 의지하니 사람 또한 봉황이네
밤 새워 차가운 눈보라는 그치질 않아
초라한 지붕에 눈이 내려 봉우리를 이루었네

待月梅何鶴 依梧人赤鳳
通宵寒不盡 遶屋雪爲峰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가 달을 기다리며 학처럼 서있다고 그려냄으로써 자연과 자연이 서로 조응하는 정경을 보여준다. 깨닫고 보면, 모든 사량 분별과 번뇌가 없고 얽매임 또한 없으며 물아일여의 경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해의 선시가 여타와 차별성을 갖는 것은 삶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깨달음의 세계를 다시 삶의 한 가운데에 끌어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의 이러한 선적 사유는 고요한 봄날 향을 피워 놓고 단정히 앉아 선정에 든 모습을 묘사한 한글 선시 ‘춘주(春晝)1’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 읽고 있는데
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따사로운 봄날 낮에 유마경을 읽는데, 가볍게 ‘나는 꽃(空華)’이 글자를 가린다. ‘공화’는 허공에 핀 꽃으로 본래 실체가 없는 번뇌 망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화자는 그 꽃을 그대로 둔다. 그러니 구태여 “꽃 밑의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라고 화자는 말한다. 유마경 속에 진리가 있겠느냐의 깨달음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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