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 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한 달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던 터라 무척 설레고 좋아하셨는데 마음과는 달리 몸은 영 불편해 보였다. 급기야 다리가 아프니 쉬어가자고 들어간 부스가 서예가 정기옥 선생님의 ‘불설대보 부모은중경’의 병풍이 전시된 곳이었다. 갑자기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 노 스님을 보고 보살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주셨다. 고마워하면서 이 병풍 만드느라 애쓰셨다니까 새벽 세 시면 일어나 금니로 쓰신다는 데 올해 일흔아홉이라고 한다. ‘부모은중경’! 그제사 눈이 번쩍 뜨이며 병풍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열네 폭에 글씨가 자잘하게 새겨져 있다. 그 사이 스님은 기운을 차리셨는지, 정기옥 보살님을 두 팔로 안아 주시고 부스를 나가신다. 올해 들어 잘 걷지 못해 뒤뚱거리고 자주 주저앉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도 있지만 짜증도 치밀어 오른다. 어머니는 사람이 있든 없든 다리가 아프면 아무데나 주저앉는 등 옆에 서 있는 사람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버릇은 내가 어릴 때부터 여전하시다. 스무 살 초반에 뇌종양 수술을 받았을 당시, 어머니는 담당의사에게 수술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시고는 그길로 절에 가서 초파일 등을 만들고 계셨다. 의사가 생각보다 일찍 수술이 끝나 보호자를 찾으니 중환자실 구석에 두라고 하셨다. 병원이 난리가 나고 한참 후 스님은 해맑게 웃으시며 그 상황을 수습하셨다. 다행히 중환자실 담당간호사가 지인이라 무사히 넘어갔지만 대단한 일이었다.

젊으셨을 때 어머니는 무척 엄하고 무서웠으며 강했다. 척추수술을 하신 아버지 대신 40킬로 쌀가마를 아파트 5층까지 번쩍 들고 오르셨으며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 운전도 무척 잘하시고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남자 이상의 면모를 보이셨던 분이라 어릴 적 에는 ‘거침없고 그냥 센 사람’ 리고 바위처럼 크고 강한 분으로만 생각했다. 뇌수술 이후 의사는 아마도 힘을 쓰거나 사람 구실은 할 수 없을 거라는 말에 나는 절망했다. 후유증도 커서 하루 열다섯 시간을 잠을 자며 무기력해졌다. 어머니는 그런 나에게 피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피리 선생님이 오셔서 상을 피면 자리에 일어났고 그때부터 나의 반항적인 사춘기는 십여 년 계속되었다. 그냥 죽고만 싶었다. 당연히 은사 스님도 ‘니 주제에… 니까짓게’ 입에 달고 사셨다. 이래도 야단맞고, 저래도 야단맞고… 나는 은사 스님 말씀을 죽어라고 듣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달랐다. 십년 동안 범패승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따라다니며 같이 수업을 받으셨다. 아이가 장애가 있으니 너그럽게 봐달라고 교수님 손을 붙잡고 사정하셨다. 동국대 김세종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나를 품어주시고 석사논문을 지도해주셨다.

그러는 사이 어머님은 많이 늙고 힘도 없어지셨다. 내가 불가에 귀의한 지 십 오 년이 지난 지금, 부처님 말씀도 귀에 들어오고 피리와 태평소를 배우는 시간이 금쪽 같이 여겨진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서 교수님께 칭찬도 받고 싶다. 밤마다 스님의 등과 다리를 밟아드리는 데 살집도 없고 앙상하니 뼈만 남았다. 다리가 부러질까 겁도 난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손수 모범을 보이셔서 천도재 의식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으시며 이제는 네가 박사 할 차례라고 말씀하신다. ‘부모은중경 십대은(十大恩)’ 중에 여섯 번째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은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아기를 낳아 여덟 섬 너 말의 흰 젖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들의 뼈는 검고 가볍다고 하셨다.

내가 이제사 부처님의 법을 알고 어머니의 은혜에 수미산을 돌면서 갚아 나갈 수 있을 지가 절망스럽다. 요즘 스님은 실담범자에 매진하느라 매일 열 시간이 넘게 쓰고 계신다, 어깨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여가면서 처절하게 쓰는 모습을 보면 먹이랑 붓을 갖다 버리고 싶다. 또 화가 치밀고 짜증이 나는 이유는 오래 못 사실까봐 염려가 생기기 때문이다. 철들자 이별이라는데 그간 허송세월이 두려워지면서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스님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으려는 그 노력들에 공포스러운 슬픔마저 밀려온다. 아픈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솔선수범을 보이신 어머님, 나의 첫 번째 스승님이시다. 그저 오래만 사십시오….

-동국대 한국음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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