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부터 봄이 와도 아지랑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릴 적 필자는 저 멀리 불꽃같이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를 보면서 삶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오현 스님은 ‘아지랑이’라는 시편에서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라고 일갈하였고, 공초 오상순은 ‘꿈’이라는 시편에서 “꿈에 나서 꿈에 살고 /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는 꿈/ 꿈은 깨어 무엇하리”라고 노래했다.

오현 스님의 ‘아지랑이’는 《금강경》의 4구게를, 오상순의 ‘꿈’은 서산대사의 〈삼몽가(三夢歌)〉를 떠올리게 한다. 《금강경》에 이르길 “일체의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라고 했고, <삼몽가>에 이르길 “주인이 꿈 이야기를 손님에게 하고 손님이 꿈 이야기를 주인에게 하니 지금 꿈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역시 꿈 속 사람인 줄 누가 알리요”라고 했다.

중국의 당나라 때 노생이라는 사내가 살았다. 노생은 여관에서 베개를 베고 잠깐 누웠다. 그리고 높은 벼슬에 올라 예쁜 아내와 결혼하고 다섯 아들을 낳아 팔순이 넘도록 장수하며 사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 영화로운 꿈을 꾼 시간은 저녁밥을 짓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고 있다. 하지만 삶이란 고작 저녁밥 짓는 순간에 꾼 꿈처럼 허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조신설화를 남긴 까닭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조신설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달례를 사랑하게 된 조신이 파계하고 환속한다. 젊은 날의 애욕은 꿀처럼 달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둘은 삶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홍안미소(紅顔微笑)는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약속(芝蘭約束)은 광풍 앞에 놓인 버드나무 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조신은 그간의 모든 일들이 꿈임을 알게 된다.

세상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갈구하는 세상의 모든 욕망이 부질없게 느껴진다고 한다. 서산 스님의 <삼몽가>, 노생의 이야기, 조신설화 등 앞서 예로 든 이야기들은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워준다.

인생은 ‘여몽(如夢)’, 즉 꿈과 같다고 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생이라는 것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번사교시여몽(翻思覺時與夢)하니 전도이견불수(顚倒二見不殊)로다’라는 《대승찬(大乘讚)》의 구절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깨어난 때와 꿈꿀 때를 뒤집어 생각해 보니 뒤바뀐 두 견해가 다르지 않구나, 라는 의미이다. 인생이 초저녁 풋잠에 꾼 꿈에 지나지 않은 것을 알면 부처이고, 이를 모르고 꿈속에서 꿈을 꾸면 무지한 중생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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