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선사, ‘금강경 사구게’, ‘전별송’, ‘오도송’

 

한암 선사(1876~1951)의 법호는 한암, 법명은 중원이다. 자신의 다른 이름처럼 차디 찬 바위(寒岩) 같은 삶을 살았던 한암은 21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기암과 절벽의 형상이 꼭 부처가 아니면 보살의 얼굴을 닮은 모습에 매료되어 장안사 행름 선사에게 출가하였다. 출가 후 제방 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에 올랐던 한암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선사(1849~1912)를 1899년 가을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친견하였다. 경허로부터 《금강경》 설법을 듣던 중 한암은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형상 있는 것이 형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사구게를 듣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9세 때부터 가졌던 “반고씨 이전에 누가 있었느냐”에 대한 의심이 확 풀렸던 것이다. 그 순간의 깨달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다리 밑에 푸른 하늘, 머리위에 산봉우리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절름발이가 걷고 장님이 눈뜸이여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네

脚下靑天頭上巒 本無內外亦中間
跛者能行盲者見 北山無語對南山

다리 밑에 푸른 하늘 있고 머리 위에 산봉우리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논리로는 용납이 안 된다. 하지만 이는 번뜩이는 선지(禪旨)의 표현이다.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그것이 사물의 진상이다. 그런 진여의 세계에선 저마다의 존재는 걸림 없이 중중무진하게 상융(相融)하고 있다. 그러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음을 걷고 장님이 눈을 뜬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눈뜬장님의 눈에는 북산이 묵묵히 남산을 대하고 있음이 보이는 것이다.

경허는 1900년 겨울 해인사에서 한암과 한철을 함께 보냈다. 한암이 떠나려 하자 경허는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라며 아쉬움의 전별송을 짓는다.

북해에 높이 뜬 붕새의 날개 같은 포부로
변변치 않은 데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려운 게 아니지만
덧없는 인생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리

捲將窮髮垂天翼 謾向槍楡且幾時.
分離常矣非難事 所慮浮生杳後期.

한암을 ‘지음’으로 표현하면서 한암을 보내는 경허의 애틋한 사랑과 별리의 정이 나타나 있다. 경허는 이별의 아쉬움과 더불어 한암이 자신과 같이 가기를 은근히 원하고 있는 심사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암은 경허의 이별시를 받아 읽고,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 있는데 뜬구름 같은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다는 뜻을 전하는 답시를 쓴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가 없을까요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있는데
덧없는 세상에서 훗날 기약은 부질없습니다

霜菊雪梅纔過了 如何承侍不多時
萬古光明心月在 更何浮世謾留期

오고가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훤히 알았던 스승 경허와 그 제자 한암이었다. 한암은 스승과의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스승의 유랑 길에 동행하지 않았다. 불세출의 선지식이자 자신의 심안을 열어 주었던 은사였건만 ‘회자정리’이고 ‘제행무상’임을 한암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리라. 경허는 이후 삼수갑산 등 북녘에서 떠돌며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민초들 속에 묻혀 살다가 원적에 들었다. 덧없는 세상에서 영영 기약 없는 이별이 되고 말았다. 이후 한암은 수행정진 하던 중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가 35세 되던 겨울이었다. 그 깊은 깨달음의 세계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부엌에서 불 지피다 홀연히 눈을 뜨니
이로부터 옛길이 인연따라 분명하네
달마가 서쪽으로 오신 뜻 묻는 이 있으면
바위 밑 물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看火炊中眼忽明 從此古路隋緣淸
有人來問西來意 岩下泉鳴不濕聲

깨달음의 경계가 수도암에서의 깨달음보다 한결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천대천세계가 불길 속에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바위 밑 물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가 어떻게 달마가 서쪽으로 온 뜻이 될 수 있는가. 바위 밑 물소리에도 결코 젖어들지 않는 그 청정한 마음이 곧 불성이요, 자성이다. 그것을 깨달은 세계에서 시공을 뛰어넘는 만고의 광명은 곧 '마음의 달'이 되어 영원토록 중생의 마음을 비춰주는 것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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