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펼쳐보는 시가 있다. 최영미의 ‘선운사에서’이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어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 한참이더군

마지막 연의 두 행, ‘꽃이 지는 건 쉬어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은 실로 절창이다. 찰나의 사랑이 영원의 그리움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이 선운사의 동백꽃을 노래했지만, 그 원형격인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의 정취(情趣)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화자는 동백꽃을 보지 못한 대신 막걸릿집 여자의 목이 쉰 육자배기 가락을 듣는다. 화자가 듣는 육자배기 가락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작년 것’이 상기도 남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왜 미당을 일컬어 ‘민족 언어의 족장’이라고 하는지 절로 이해하게 된다.

동백꽃은 통꽃이어서 꽃이 질 때 시들지 않고 봉오리 째 툭 떨어진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동백을 보고서 핏빛의 비장미를 느끼는 것이다. 어디 시인뿐이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동백아가씨’라는 노래에서 동백꽃을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든 꽃”으로 표현하고 있다.

꽃물은 아랫녘에서 윗녘으로 올라오고 단풍물은 윗녘에서 아랫녘으로 내려온다. 동백꽃이 피어서 지고 나면 목련꽃과 벚꽃이 피어서 진다. 지금은 남도에 꽃물이 한창이지만, 머지않아서 꽃물은 강원도까지 물들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봄이 되면 꽃구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졸저 《하루코의 봄》의 마지막을 아래와 같이 마무리했다.

“꽃을 피우는 일은 그 당사자인 식물의 처지에서 보자면 얼마나 더디고 가슴 졸이는 일이겠는가? 심장이 터지는 것 같은 순간순간의 아픔을 이겨낸 뒤에야 피어나지만, 소나기 한 번에도 지고 마는 꽃잎들. 어쩌면 가지를 찢고 올라온 그 아프고 환한 자리가 바로 우리들의 삶인지도.”

올해 봄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기 전에 꽃 핀 나무 그늘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잠시 동안이라도 서 있도록 하자. 부는 바람에 후둑후둑,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느껴보도록 하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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