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월면, ‘오도송’, ‘난을 보며’, ‘세계는 한 송이 꽃’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성우의 법을 계승하고 선지종풍을 진작시킨 만공월면(1871~1946)은 미륵부처가 업어주는 꿈을 꾸고 나서 식구들 몰래 출가의 꿈을 키웠다. 14세 때,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던 만공은 10월 동학사를 찾아온 경허를 따라 가 서산 천장사에서 12월 8일 태허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천장암에 들른 한 어린 스님이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이 어딘가”(萬法歸一 一歸何處)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이 물음에 꽉 막힌 만공은 천장암을 빠져나와 봉곡사로 갔다. 이곳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에 들어간 만공은 2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하룻밤을 꼬박 지내다가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깨달았다.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만공은 자기 안에 깃들인 불성을 보았으며, 또한 그 불성이 삼라만상에 두루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삼년 후 경허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지 못했으니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다시 정진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만공은 치열하게 수행정진 하였다. 1901년 여름 통도사 백운암에 들러 머물며 새벽 종성 가운데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같은 어둠을 모두 밝히게 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圍幽岩悉皆明)라는 게송을 듣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해 7월말 다시 본사인 서산 천장사로 돌아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홀로 거닐며 자재하는 법열을 즐겼다.

어느 날 만공은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을 참배하고서 비로봉에서 뻗어 내린 산봉우리들을 휘감으며 흐르는 차갑고 맑은 오대산 물에 번뇌를 씻으니 보고 듣는 만물이 그대로 문수보살의 화현임을 노래하였다.

뼛속에 흐르는 오대산 물에
문수의 마음 씻겨 흐르네
그대 만일 이렇게 깨닫는다면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문수사리네.

臺山骨利水 洗去文殊心
若能如是解 頭頭文殊師

달과 교감을 하여 달이 완전히 차거나 비었을 때는 길을 내고, 반달 전후로는 물을 불러 모아 섬이 되는 관음도량 간월암, 조선개국 시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훗날 만공이 간월암이 조선 개국도량이라는 상징성을 중시하여 복원불사 원력을 세운 것은 조국독립과 국태민안의 발원이었다. 1942년 간월암을 복원하고 그곳에 주석하며 지은 다음의 시는 깨달음의 향기를 일깨워 준다.

깨끗한 반야 난초
때때로 깨달음의 향기 토하네
사람도 이와 같음을 알면
모두가 비로자나 부처님이네.

淸淨般若蘭 時時吐般若
若人如是解 頭頭毘盧師

난초의 단아하고 청초한 외양과 중생들도 난초처럼 청정한 성품과 행동으로 맑은 향기를 발할 때 모두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임을 만공은 설파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만공은 많은 제자들과 함께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만공은 상좌한테 붓과 무궁화 꽃 한 송이를 가져오게 하여 무궁화 꽃잎에다 '세계일화'라고 썼다. 이것이 세상 삼라만상이 한 송이 꽃이라는 만공의 유명한 법문 게송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모든 생명은 차별 없이 하나임을 꽃에 비유한 것이다. 만공은 ‘세계일화’의 큰 뜻을 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일체 중생을 부처로 보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그런데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으로 피워나길 염원했던 그는 이 가르침을 전하고 1년 후에 입적했다. 하지만 만공의 ‘세계일화’의 염원은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진력한 숭산에 의해 널리 펼쳐졌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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