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제전문가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게 누구냐. 돈이거든요.” 그의 말이 내내 걸렸다. 수긍하면서도 동의할 수 없고, 부정할래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그래서 불편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돈에 매몰시킨 신자유주의는 우리 생각의 밑바닥까지 지배한다.

그러나 세상은 돈이 있어도 얻을 수 없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치들이 아직은 많다. 최근 인기를 끈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재벌가 자녀의 학교폭력과 그것을 덮는 더러운 짓은 돈의 힘이었지만, 끝내는 파멸을 맞는다. 우정, 자비, 사랑, 친절, 배려, 돌봄은 돈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마음이 스며있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가치들이다. 돈이 끼어들면 오히려 훼손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도 돈은 필요하다. 많아서 나쁠 것도 없다. 없어서 문제를 일으킨다. ‘더 글로리’에서 명품점 점원 경란은 하녀처럼 살며, 강현남은 여자들을 ‘사모님’으로 호칭한다. 그들이 체득한 생존기술이다, 가난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낮추고 자신을 부속품으로 여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에 진입했다. 세계 10위다. 불과 반세기만에 이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뤘으니 대단한 성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평균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연간 4천만원 정도이니 넉넉한 편이어야겠지만, 편중되어 있으니 모두가 형편이 좋은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 열 명 중 일곱은 가난의 고통을 겪고 있다. 2022년의 고용률은 62.8%에 머물러 있으며, 이 가운데 비정규직은 41.4%다. 비정규직의 평균 월급여는 191만원 정도로 최저임금 수준이다.

우리는 돈이 얼마나 있어야 사람의 격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 오래전 방문한 베네딕토 수도원은 그들의 경제수준을 중위소득에 맞춘다. 중위소득은 전체 가구의 소득 순위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소득을 말한다. 보건복지부 내 중앙생활보장위원회가 발표한 2022년 중위소득은 1인 가구의 경우 1,944,812원이다. 이 해 최저임금에 따른 월급여가 1,914,440원이니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신부와 수사들의 경제생활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물론 주거공간이 이미 갖춰져 있고, 공동생활에 따른 지출의 효율이 높아서 중위소득자보다는 형편이 나을 수밖에 없다.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신부님은 “생활의 필요가 충족되고, 죽으면 여기에서 만든 나무관에 넣어 묻어줍니다. 그러니 번거롭게 내 지갑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라고 말했다. 아무튼 그들은 생활수준을 중위소득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베네딕토 수도원의 사례를 일반인에게 적용하기는 어렵다. 검약을 생활화하는 수도자들의 공동체이기에 가능하다. 많은 공동체에서 그렇듯이 그들도 기본적인 생활수단을 공유하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으며, 줄인 양만큼 사회적 공유의 양을 늘릴 수 있다.

경제와 관련한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는 돈을 어떻게 벌어들이며, 그 쓰임새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 있다. 정직하게 힘써 세상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그 쓰임은 저축과 가족의 돌봄, 수행자 뒷받침, 일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또 다른 쓰임은 중생들을 위한 회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편중은 일정부분 불가피한 현상이다. 때론 부의 편중이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경쟁심을 불러일으켜 활력이 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인간성을 해치는 정도를 완화하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의 유지가 어렵다는 데 있다. 그래서 중생들을 위해 회향하라고 했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소득을 보전해주는 효과를 내는 의료, 양육과 교육, 주거 등에 대해서만큼은 공공성을 넓혀가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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