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사이/ 절간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

위 시는 미당 서정주의 ‘가벼히’이다. 이 시편의 모티브는 아마도 부처님의 일화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행공동체를 둘러보다가 이전에 없던 나무로 잘 지어진 요사채를 보고서 아난존자에게 물었다.

“저 집은 누가 지은 것이냐?”
“목수 출신의 수행자가 지은 것입니다.”
“당장 저 집을 허물어라.”

한국불교계의 현황을 보면 전각(殿閣)과 당우(堂宇)를 짓고 보수하는 데만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한국의 승가가 1,600여 년의 역사 동안 산림과 사찰을 지키는 역할을 해왔고, 그러한 공덕으로 한국불교의 유형문화재들이 잘 보존돼 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전각과 당우를 짓고 보수하고 나아가서는 유형문화재를 보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불사들도 많다. 이를테면, 사회에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교육하는 것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불경을 쓰고 출간하는 것도,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신문방송, 문학, 연극, 영화 등을 만드는 것도 모두 불사에 해당한다.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곳이니 마땅히 불자라면 가람을 수호하고 도량을 정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눈에 보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하는 것이다. 가섭존자가 아난존자에게 “그대가 도를 깨쳤다면 찰간대를 부러뜨려라”라고 말한 이유도 부처님의 교설에서조차도 자유로울 때 성불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 것이리라. 가섭존자는 한곳에 삼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소유개념이 생기기 때문이다. 역대 조사님들은 유위법이 아닌 무위법을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불자라면 마땅히 마음속에 절 하나는 지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른 불자라면 마땅히 자신이 마음속에 지은 절 하나를 미련 없이 허물 줄도 알아야 한다. 만약 사찰불사를 앞둔 주지스님이 있다면 아래의 홍사성의 ‘불사(佛事)’라는 시편을 마음에 아로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천 직지사는 중창불사를 하면서/ 부처님 법문 들을 때 올라가는 황학루를/ 약간 비껴 지었다 합니다/ 하필이면 누각 지을 자리에/ 못생긴 개살구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무 살리려고 그랬다 합니다/ 쓸모없다고 베어내자는 사람 여럿이었으나/ 주지스님이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비뚜름하게 지었다 합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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