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의순, ‘동다송’, ‘중정의 묘’, ‘옥화 한잔’ 등

 

선교를 두루 섭렵해 대흥사 13대 강맥을 이은 초의의순(1786~1866)은 시ㆍ서ㆍ화ㆍ 차에 뛰어나 4절이라 불렸다. 15세에 나주 운흥사의 벽봉민성을 은사로 출가한 후 20세에 대흥사 완호윤우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초의(艸衣)라는 법호를 받았다. 초의라는 법호를 내린 것은 초의의 귀기어린 천재성과 번득이는 재주를 완곡하게 감추어 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초의에게 차와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 한 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다. 이는 차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지암(一枝庵)에서 초의는 정조의 사위 홍현주의 요청으로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동다송》을 저술,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 차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다. 다음은 《동다송》첫 구절이다.

하늘이 좋은 나무 귤의 덕과 짝 지우니 后皇嘉樹配橘德
천명 받아 옮김 없이 남국에서 난다네 受命不遷生南國
촘촘한 잎 눈과 싸워 겨우내 푸르고 密葉鬪霰貫冬靑
흰 꽃은 서리 씻겨 가을 떨기 피우네 素花濯霜發秋榮

차나무가 인간에게 베푸는 덕과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는 성품, 푸름을 잃지 않는 품격, 가을의 영화로움을 한껏 자랑하는 꽃의 소박함과 향기 등 차나무의 생김새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초의는 중정(中正)에서 차 정신의 핵심을 찾는다. 이른 아침에 찻잎을 딸 때 현묘함을 다하고, 찻잎을 지극정성으로 법제하며, 차를 우릴 때는 참물을 얻고, 달일 때 불의 세기는 그 중정을 얻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가운데 현미함과 오묘함이 드러나기 어려우니 中有玄微妙難顯
진실로 정은 체와 신과 분리되게 해서는 안 되네 眞精莫敎體神分
체와 신이 온전하더라도 중정을 잃을까 염려되네 體神雖全猶恐過
중정이라는 것은 건과 영이 함께하는 것일세 中正不過健靈倂

체(體)인 물과 신(神)인 차가 서로 어울리면 건실함과 신령함이 아울러 갖추어진다. 때문에 차를 마시면서 신과 체를 규명하여 건과 영을 얻어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바라밀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묘한 무착바라밀(無着婆羅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차이다. 또한 초의는 맑고, 차고, 부드럽고, 가볍고, 아름답고, 비위에 맞고, 냄새가 없고, 탈이 없어야 하는 등 물의 여덟 가지 덕을 강조했다. 그가 일지암을 떠나지 않고 40년 동안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 수행에 전념하였던 것도 이곳의 유천(乳泉, 어머니의 젓 같은 샘물)은 이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다선일여의 수행을 했던 초의는 푸른 옥색 같기도 하고 연한 연두색 같기도 한 영롱한 차를 마심으로써 다선(茶仙)의 탈속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일어
몸 가벼워져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己涉上淸境

초의는 《다신전》에서 혼자 마시는 차를 신(神)이라 해서 신비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 승(勝)하다 하였다. 이는 좋은 정취, 또는 한적한 경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다고 했다.

밝은 달은 촛불이요 또 벗이라 明月爲燭兼爲友
흰 구름 자리삼고 병풍으로 삼았네 白雲鋪席因作屛
대나무소리 솔바람은 시원도 하여 竹籟松濤俱蕭涼
맑고 서늘한 기운 뼈와 가슴에 스미네 淸寒瑩骨心肝惺惟
오직 흰 구름 밝은 달 두 손님만 허락하니 許白雲明月爲二友
도인의 찻 자리 이보다 좋을 손가 道人座上此爲勝

선가의 일심(一心)은 말을 끊고 생각을 끊은 자리에 있다. 그러기에 오직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 삼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수행자의 최고의 찻자리인 것이다. 자성을 일깨우는 찻자리 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가(禪家)의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와 다선일미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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