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태능 ‘기우자’, ‘오도송’, ‘물 위의 진흙소’

 

어머니가 선승으로부터 대승경을 받는 태몽을 꾸고 태어난 소요 태능(1562∼1649)선사는 13세에 백양산에 놀러갔다가 그곳의 수려한 경치에 매료되어 출가를 결심하여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를 받았다. 이어 부휴대사로부터 경과 율장을 배운 후, 묘향산의 서산대사를 찾아가 법을 구하였다. 공부가 전혀 진전이 없자 선사는 스승에게 떠날 결심을 말씀드리고 하직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스승은 그 자리에서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 물속의 거품을 모두 태우다니/ 어허 우습다, 소를 탄 사람아/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斫來無影樹 銷盡水中漚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라는 게송을 주면서 공부에 참고 하라고 일러주었다. 선사는 이 화두를 받아들고 치열한 용맹정진을 하던 중, 설풍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하였다.

흐르는 별과 폭죽의 날카로운 칼날 우뚝하고,
갈라지는 돌 무너지는 언덕의 기상 높도다.
사람을 죽이고 살림이 왕의 검과 같은데
늠름한 위풍이 온 세상에 가득하도다.

飛星爆竹機鋒峻 烈石崩意氣像高
對人殺活如王劍 凜凜威風滿五湖

오도송이다. 선승들이 반드시 구족해야 하는 지혜작용을 살인도와 활인검으로 표현한다. 살인도는 분별의식과 상대적인 대립관념이라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의 실천을 죽인다는 의미로 표현된다. 그리고 본래 청정한 불성의 지혜로 여법하게 삶을 살아가는 반야지혜가 활인검이다. 흐르는 별과 날카로운 폭죽의 칼날, 갈라지는 돌과 무너지는 언덕은 무명의 적을 죽이고 나아가 법신의 불을 살리는 선사의 자유자재한 금강보검 활용의 당당한 기풍이 언급되고 있다.

선어 가운데, ‘그림자 없는 나무’(無影樹), ‘뿌리없는 나무’(無根樹), 혹은 ‘철 나무에 피는 꽃’(花開鐵樹), ‘불 속에 피어나는 연꽃’(火中生蓮) 그리고 ‘고목에 꽃이 핀다’(枯木放花) 등의 표현은 논리를 떠난 격외언어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형상이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이 드러내자니 비정상의 언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물 위의 진흙소가 달빛을 갈아엎고
구름 속 목마가 풍광을 끄네
옛 부처의 노래는 허공의 뼈다귀
외로운 학의 울음소리 세상 밖으로 퍼지네

水上泥牛耕月色 雲中木馬掣風光
威音古調虛空骨 孤鶴一聲天外長

물 위의 진흙소는 물에 바로 녹아 버리는 존재이며, 이러한 진흙소가 물에 어른거리는 달빛을 갈아엎을 수는 없다. 구름 속의 ‘목마’ 역시 존재치도 않으며, 그러한 목마가 풍광을 고를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고자 애쓰는 것이 중생의 모습이다. 아울러 달빛을 갈아엎는다는 것은 달빛 같은 환상을 쫓아 부질없이 허무한 욕망에 끄달리는 우리 인생의 도정을 풍자한다. 결국 물에 녹지 않는 흙, 불에 타지 않는 나무, 용광로에 녹지 않는 쇠, 그것이 바로 참된 ‘나’이다. 세상 밖을 향해 부르는 외로운 학의 울음소리는 고독한 산승이 던지는 깨달음의 시적 사자후라 할 수 있다.

선사의 시적 세계에서도 자연은 단지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이상이며 그 자신의 해탈의 경계이다. 이 경지에서 선사는 흰구름, 푸른 산, 목련꽃,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서 반야의 무정설법을 듣고, 청정법신의 원음을 듣는다.

흰 구름 끊긴 곳 푸른 산이요
해가 지는 하늘가 새는 홀로 돌아오는데,
세월 밖의 자비로운 모습 언제나 느끼고 뵈오니
목련꽃 피는 날에 물은 졸졸 소리없이 흐르네

白雲斷處是靑山 日沒天邊鳥獨還
劫外慈容常觸目 木蘭花發水潺潺

흰 구름이 걷히면 푸른 산이 드러나고, 해가 지면 돌아오는 새의 모습을 보며 살아가는 선사는 세월을 뛰어 넘어 반기는 자비로운 문수보살상에서 일체의 집착과 속박을 벗어나 유유자적하게 소요(逍遙)하게 된다. “물은 승니의 파란 눈이요, 산은 부처님의 푸른 머리로다. 달은 한 마음의 도장(印)이요, 구름은 만권의 경전이다”고 설했던 선사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일문을 이루어 소요종파(逍遙宗派)를 형성하고 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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