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무문관》28칙 ‘구향용담(久響龍潭)’ 대목을 읽다가 이청준 소설가의 작품이 떠올랐다.

덕산스님이 가르침을 청하러 왔을 때 마침 밤이 깊어서 용담스님이 “그만 물러가라”고 했다. 덕산스님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으나 너무 어두워서 다시 돌아왔다.
“바깥이 깜깜합니다.”
용담스님은 지등(紙燈)에 불을 붙여 건네주었다. 덕산스님이 지등을 받으려고 할 때 용담스님은 입김으로 불을 꺼버렸다. 순간 덕산스님은 깨닫고 용담에게 절을 올렸다. 《금강경(金剛經)》에 밝았던 덕산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주장하는 남종선의 스님들을 교학적인 논리로 타파하려고 길에 오른 것이었다. 덕산스님이 지등의 불빛이 꺼지는 순간 깨달은 것은 바로 문자 밖에 있고 경전 밖에 있는 선지(禪旨)였다.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말미는 눈이 먼 목사가 어둔 방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내용이다. 목사가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으나 손님은 웬일인지 아무 대꾸도 없이 방 안만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나서야 손님은 목사의 모습을 알아보고 말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어두운 방에서 혼자 그러고 떨고 계십니까?"
손님의 말을 듣고서야 목사는 커튼이 내려진 창문 쪽으로 걸아가면서 농기가 섞인 말투로 한 마디 덧붙였다.
"전 이따금 제가 보는 것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놔서요."
이청준은 저자의 말에서 “그는, 사람에겐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과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유의 눈, 그리고 느끼고 직관하는 영혼의 눈까지, 세 가지 차원의 눈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그 영혼의 눈을 뜨게 되었으므로,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기실, 필자에게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은 전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이었다. 말끝에 스님은 “그 끝을 읽고 나면 절로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게 될 거야.”라고 덧붙였다.

덕산 스님이 암흑 속에서 환한 빛을 봤듯이, 오현 스님도 육신의 눈이 멀고 나서야 영혼의 눈이 뜬 목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심안(心眼)에 개안(開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는 육신의 눈이나 사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게 있다. 선종(禪宗)에서는 문자 자체를 번뇌로 보고, 지식(知識)을 지해(知解) 즉, 알음알이로 보는 것도 같은 이유이리라.

이청준 소설가도 영면(永眠)에 드셨고, 오현 스님도 열반(涅槃)에 드셨다. 그래서 더욱 지식을 뽐내지 않고도 지혜를 일러주고 지척의 자로는 잴 수 없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지식이 그리울 따름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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