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다녀오는 길이다. 늦은 귀갓길, 전철 막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길까지 잘못 들었다. 햇살을 쏟아 붓던 오후가 진눈깨비를 퍼붓고 있다. 지금 남산은 숲의 냉대림이다. 일행과 헤어져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명동 전철역으로 뛰었다. 계단 아래로 겅중겅중 내려가는 도시의 중력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있다. 쇼핑백을 양팔에 잔뜩 걸친 외국인들이 계단 밑 외진 곳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다행히 전철은 끊기지 않았다. 긴장한 탓인지 머리가 아팠다. 커피 한잔 마시면 나으려나 자판기에서 블랙커피를 빼서 마시는데 막차가 들어오고 있다.

전철 안 풍경은 일색이다. 까만 파카의 승객들,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처럼 부풀어 있다. 종점까지 가야 하는데 자리가 비좁다.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핸드폰 스크롤바를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서로의 팔이 부딪힌다. 자리를 옮길 생각으로 일어섰다. 마땅한 자리가 나올 때까지 걷다 보니 벌써 세 칸째 이동 중이다. 비좁아 보이지 않은 승객 사이에 앉았다. 그때 얼굴에 뭔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졌다. 아뿔싸!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아무도 아니 나조차도 마스크 미착용을 알지 못하다니! 마스크에 대한 무감각인가. 코로나19에 대한 불감증인가. 가방을 열어 마스크를 찾는다. 한참을 부스럭대며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 마스크. 양옆 승객께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꾸도 반응도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스크 미착용자를 보면 마스크 여분을 건네주곤 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승객의 마스크가 코밑으로 내려와도 우리는 서로 올리라는 손시늉을 주고받지 않았던가. 만약 내가 감염자라면 승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따가운 가을볕 아래 멍석 위에서 도리깨질 당하는 메주콩처럼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기침만 해도 눈치를 주고 눈치를 받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2020년 1월 20일 코로나19 환자가 국내 처음으로 발생한 이후, 지난 3년 동안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방역 수칙을 자발적으로 실천하였다. 전대미문의 신종감염병과 싸워 어려운 고비를 견뎌냈다는 방역 당국의 기사를 여러 차례 읽었다. 그랬다. 우리는 자발적이었다. 마스크 미착용자를 보면 적극적으로 알렸다. 목소리로 눈으로 때로는 손가락으로 어깨를 꾹 찌르기도 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런 행동이 코로나19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월 30일 현재 실내 마스크 강제 착용 의무를 권고로 전환했다. 이번 겨울 7차 대유행이 지났고, 중국 내 위기가 정점을 찍었고, 국내의 감염자 중증 환자 감소와 의료 대응 능력이 안정화되었다.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실행한 지 27개월 만이다.

신규 변이와 해외 상황을 보면, 미국과 일본 코로나19 감염 확진자 수는 줄어든 반면, 확진자 사망은 상승 추세다. 중국도 확진자는 줄었지만, 춘절 명절 동안 대규모 이동으로 유행이 지속할 수도 있다. 국내 상황 또한 백신 접종과 자연 감염으로 일정 수준의 방어력을 획득하였다. 입국자 검열로 인해 해외 유행이 국내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다. 단기 내 급증할 우려는 적지만, 코로나19 감염자와 고위험군 환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도록 마스크 착용은 강력하게 권고한다고 했다. 권고의 실행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속에는 태곳적부터 자발적 유전자가 있다.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자발적 방역이란 무엇일까. 지난 3년 동안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마스크를 챙기고, 방역 수칙을 지키고, 마스크 미착용자를 발견하면 귀하가 착용한 마스크와 마스크 미착용자의 입을 무언극처럼 가리키면 되는 일. 참 쉽지 않은가. 당고개에서 청학리로 넘어가는 산으로 둘러싸인 도로가 녹아내린 동토층처럼 질펀하다. 요즘 날씨는 한 치 앞을 모르겠다.

-시인ㆍ한국불교신문 2022 신춘문예 시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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