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 일선, ‘우연히 읊다’, ‘깨달음의 노래’

 

정관 일선(1533-1608)은 사명 유정 · 편양 언기 · 소요 태능과 함께 ‘서산 4대 문파’의 맏형으로, ‘정관문파’를 이루었다. 15세에 출가한 선사는 법화신앙에 심취하여 법화경을 부지런히 독송하였고, 또 그 공덕의 뛰어남을 역설하였다. 선정과 지혜로 용맹정진의 수행을 강조하였던 선사는 보고 듣는 감각은 현상에 불과한 것이니, 보고 들음에 구애되지 않으면 텅 비고 맑은 본래심이 드러남을 이렇게 설파하였다.

듣지 못하면서 자성을 듣고 不聞聞自性
보지 못하면서 참 마음을 보고 無見見眞心
마음과 성품 모두 잊는 그 곳에 心性都忘處
텅 비고 맑은 물과 달이 나타나리 虛明水月臨

귀머거리이자 장님인 선객에게 그에 맞는 수행의 방편을 전하고 있다. 비록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마음과 성품에 집착하지 않으면 견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승의 경우, 자연은 단지 감각적 즐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해탈의 경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솔바람은 사람의 귀를 맑혀 주고 松韻淸人耳
시냇물 소리는 꿈을 이끄는 구나 溪聲惹夢魂
재를 올린 뒤 한 잔의 차 마시며 齋餘茶一椀
아침 저녁으로 바람과 달 즐기네 風月共朝昏

대둔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소리는 진여의 모습이고, 불법을 완벽하게 설하고 있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산산수수(山山水水) 일초일목(一草一木)이 도 아님이 없고, 불성 아님이 없다. 재를 올린 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조석으로 바람과 달을 즐기는 산승의 생활은 청정한 경계가 일으키는 시정이며, 자아의 합일의 선정의 세계이다.

몰현금. 줄이 끊어진 거문고를 말한다. 줄이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울린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장부 소리를 듣고자 하려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놓았다 다시 들어 올려야 함은 물론, 몰현금 한 줄 정도는 탈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장부의 모습은 선사의 <우연히 읊다〉에서 잘 드러난다.

산사의 봄바람 별스레 차가운데 竹院春風特地寒
낮게 읊조리며 오래 작은 난간에 앉아 있네 沈吟長坐小欄干
줄 없는 거문고 소리 알아듣는 이 없으니 沒絃琴上知音小
홀로 거문고 안고 달빛 아래 타네. 獨抱梧桐月下彈

차가운 봄바람, 산사의 밝은 달 아래 홀로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선사이다. 오동(梧桐)이 천년을 서서 속을 비우니 줄이 없어도 바람이 와서 거문고를 뜯는다고 한다. 현금이 울지 않는데도 귀가 맑아지고, 은은하여 더욱 깊어지는 그 청아한 소리에 선사는 맑은 공명을 담아낸다. 망념을 여읜 맑은 마음의 눈으로 들어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진여의 법문이다. 선시가 깨달음의 노래인 이유도 이와 같다.

선사들의 열반송은 속박과 번뇌, 미망과 아집 속에서 살아온 일생을 더듬고 마지막 입멸의 순간에 던지는 ‘깨달음의 노래’이다. 장대한 우주적 법문으로 유한의 세계가 아닌 무한의 세계이며, 생사의 걸림이 없는 자유 자재함의 선적인 세계이기에 그 감동은 매우 크다.

평생 입으로 지껄이던 것 부끄러우니 平生慙愧口喃喃
이제야 분명히 많은 생각 뛰어 넘었네 末後了然超百億
말 있고 말 없음 이 모두 도 아니니 有言無言俱不是
부디 그대들은 스스로 이를 깨달으라 伏請諸人須自覺

평생 덕유산을 무념처로 삼아 수행했던 선사의 깨달음이 이 〈열반송〉에 녹아 있다. 평생 입으로 지껄인 것을 부끄럽게 여긴 선사는 이제야 참된 깨달음을 말하나니, 그것이 바로 ‘유언 무언이 모두 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궁극지로서 ‘묘오’의 경지인 것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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