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는 ‘이차돈의 목 베기 놀이’라는 시편에서 예수와 이차돈의 순교를 대비했다.

예수의 순교는 “대단히 처참하고 처량하고 또 아픈 데가 있는 데 반하여”, 이차돈의 순교는 “그렇지 않고 순전히 어린아이의 한때의 무슨 놀이와도 같아서 적당히 웃기기도 하면서 아주 연한 배나 먹듯이 사운사운 진행”되었다는 게 미당의 견해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예수의 순교는 “왈칵한 피비린내”를 풍겼지만, 이차돈의 순교는 “그저 어린애들이 꿀컥꿀컥 마시는 그 어머니의 젖 냄새 같은 것만 풍겨났다”는 데 있다. 미당은 이차돈의 하얀 피를 ‘어머니의 젖’으로 환치함으로써 이차돈의 순교를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놀이’로 정의하였다. 이차돈의 순교가 아주 연한 배나 먹듯이 사운사운 진행됐다는 것은 한국에 전래된 이래 토속신앙과 물리적인 충돌 없이 대중의 종교로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한국불교는 전래된 이래 다른 종교와 물리적인 충돌이 없었다. 필자는 그 이유에 대한 해답을 부루나 존자의 일화에서 찾고자 한다.

부처님이 묻는다.
“수로나국 사람들은 성질이 난폭하여 헐뜯기를 잘 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부루나 존자가 대답한다.
“꾸짖더라도 손이나 돌로 때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그들이 칼이나 몽둥이로 너를 찌르고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죽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몸은 언제인가를 버려야 할 것인데, 그들이 고맙게도 해탈케 해주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너는 인욕을 성취하였구나. 너는 이제 수로나국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들에게 가서 제도 받지 못한 사람을 제도하고, 불안한 사람을 편안케 하며, 열반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열반을 얻게 하라.”

인욕을 성취한 부루나 존자이기에 수로나국에 가서 500여 명을 불법에 귀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출가자가 급감하고 신도가 줄고 있는 불교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퇴전의 자세, 어떠한 고통도 참아내는 인욕의 자세를 지닌 제2의 부루나 존자의 출현이 필요하다. 천진무구하여서 “어린아이의 한때의 무슨 놀이와도 같아서 적당히 웃기기도 하면서 아조 연한 배나 먹듯이 사운사운” 전법을 할 줄 아는 제2의 부루나 존자가 출현한다면 그 포교현장에는 “그저 어린애들이 꿀컥꿀컥 마시는 그 어머니의 젖내음새 같은 것만 빙그레히 풍겨”날 것이다.

중국의 계성(繼成) 스님은 향상일로(向上一路)를 묻는 질문에 “아래로 내려오면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향상일로란 말 그대로 지극히 높은 깨달음의 길을 일컫는다. 자신의 몸을 낮출 때만이 자신의 정신을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아래로 내려갔기에 위로 오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루나 존자의 포교는 계성 스님이 전한 향상일로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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